무극역(無極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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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경기도 지역의 역도 중 하나인 영화도(迎華道)에 속한 역.

개설

무극역(無極驛)은 고려시대에는 양광도의 역도(驛道)인 광주도(廣州道)에 소속되었다. 조선초에 전국적으로 역도-속역 체계가 재편되면서 경기좌도충청도정역찰방의 관할 하에 있었으며 세조대에는 경기좌도정역찰방의 관할 하에 놓이게 되었다. 성종 연간에 반포된 『경국대전(經國大典)』 체제에서는 양재도(良才道)의 속역으로 편제되었다. 이후 정조 연간에 양재도가 영화도(迎華道)로 개편되면서 영화도의 속역이 되어 갑오개혁 때까지 존속하였다.

설립 경위 및 목적

『고려사(高麗史)』 「병지(兵志)」 참역(站驛) 조에 따르면, 고려시대에는 광주도에 소속된 15개 속역 가운데 하나로 음죽현에 위치하였다.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으나, 고려의 역제가 22역도-525속역 체제로 정비된 995년(고려 성종 14)에서 1136년(고려 인종 14) 사이에 광주도에 속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조직 및 역할

조선 영조 때 편찬된 『여지도서(輿地圖書)』경기도 음죽 조에 따르면, 당시 무극역에는 상등마 1필, 중등마 3필, 하등마 1필 등 총 5필의 역마가 배속되어 있었다.

조선시대의 무극역은 조령과 한양을 연결하는 사행로에 위치했기 때문에, 사신들의 영송(迎送)과 수발을 주요 업무로 하였다. 그 때문에 1420년(세종 2)에는 형조의 건의에 따라, 무극역에 짐을 운반하는 노비 8호(戶), 정역(正役) 10명, 봉족(奉足) 2명을 배속하여 역의 운영을 돕도록 하였다(『세종실록』 2년 8월 12일). 또 1425년(세종 7)에는 무극역에서 사신의 접대와 영송을 담당하는 인원이 4명밖에 되지 않는다는 지적에 따라 배속 노비를 증원하는 방안이 논의되기도 하였다(『세종실록』 7년 11월 3일).

변천

고려시대의 무극역이 위치한 음죽현은 1018년(고려 현종 9)에 충주목에 소속되었는데, 조선시대에 들어와 행정 구역이 개편되면서 경기도로 이속되었음을 『신증동국여지승람』 경기 음죽현 조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런데 이때 무극역은 음죽현과 함께 경기도로 이속되지 않고 그대로 충주의 관할 아래에 있었다. 그러다 1427년(세종 9)에 무극역이 충주의 지경(地境)에 속해 있어 사신의 영접과 전송이 원활하게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이유로 무극역을 음죽현 소속으로 환원시키는 조치가 내려졌다. 그에 따라 무극역은 경기도 음죽현의 관할이 되었다(『세종실록』 9년 1월 22일).

그 뒤 1431년(세종 13)에는 경기 정역찰방(程驛察訪)이 1명밖에 없어서 찰방의 사무가 몹시 번거롭고 역리(驛吏)들이 쇠잔해지는 폐단이 생겨났다. 그리하여 찰방 1명을 증원해 경기우도정역찰방과 경기좌도충청도정역찰방으로 나누었는데, 이때 무극역은 경기좌도충청도정역찰방에 편제되었다(『세종실록』 13년 1월 10일).

세조 연간인 1460년(세조 6)에는 각 역도의 역로가 멀어서 찰방이 순시하기가 어려울 뿐 아니라 역마와 사람이 모두 곤폐하다는 지적에 따라 전국적으로 역로의 개편을 추진하였다. 그 결과 무극역은 경기좌도의 속역으로 편제되어 경기좌도찰방의 지휘를 받게 되었다(『세조실록』 6년 2월 5일).

뒤이어 성종대에는 『경국대전』이 반포되면서 조선시대 전기의 역참 제도가 확립되었는데, 이때 무극역은 양재도의 속역으로 편제되었다. 이후 1785년(정조 9) 양재도가 영화도로 개편되면서 영화도에 속하게 되었다. 그 뒤 조선시대 후기까지 영화도의 속역으로 존속하다가, 1896년(고종 33) 1월에 대한제국 칙령 제9호 ‘각 역 찰방 및 역속 폐지에 관한 건’에 따라 폐지되었다.

참고문헌

  • 『고려사(高麗史)』
  • 『경국대전(經國大典)』
  • 『대전회통(大典會通)』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여지도서(輿地圖書)』
  • 조병로, 『한국근세 역제사연구』, 국학자료원,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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