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사청(公事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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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왕명의 전달을 관장하던 내시인 승전색(承傳色)이 근무하던 청사.

개설

공사청은 조선 초부터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1894년(고종 31)에 혁파되었다. 공사청에서는 왕명의 전달 이외에도 국왕이 내려주는 계하문서(啓下文書)의 ‘계(啓)’ 자 날인을 담당하였다.

설립 경위 및 목적

공사청이 설치된 시기는 정확하게 알 수 없으나 이미 조선 건국 초기부터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초기부터 내시들의 왕명 전달 역할이 확인되기 때문으로(『태종실록』 7년 7월 19일), 이들을 위한 별도의 청사가 마련되었을 것이다. 다만 현재 확인되는 기록상으로는 1527년(중종 22) 국왕이 공사청을 언급하는 과정에서 처음으로 등장한다(『중종실록』 22년 4월 3일).

조직 및 역할

공사청에는 내시인 승전색을 비롯해 사알(司謁), 공사별감(公事別監)과 하례(下隷)인 대령(待令)이 근무하였다. 이들은 왕명을 전달하는 역할은 물론이고 국왕이 내리는 계하문서에 ‘계’ 자를 날인하는 역할을 담당하였다. 간혹 ‘계’ 자가 날인되지 않은 채 계하되는 문서가 있어 문제가 되기도 하였다. 이 밖에도 공사청에서 왕명 전달 과정에서 여러 가지 문제점이 노출되었다. 1660년(현종 1)에는 경상감사가 왜인의 선박이 왕래한 현황을 월말에 정리해서 보고한 것을 국왕이 확인하고 계하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종이의 끝부분이 잘려서 문서를 가지고 간 별감이 의금부에 수감되기도 하였다. 또한 1785년(정조 9)에는 국왕이 내린 초기(草記)를 늦게 반포하였다고 하여 공사청의 사알이 추고(推考)의 벌을 받았고, 1786년(정조 10) 11월에는 계하한 순감군단자(巡監軍單子)를 누락하기도 하였다.

변천

공사청은 각 궁궐마다 설치되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중종 연간의 기록이 경복궁에 해당된다면, 1616년(광해군 8) 공사청을 각별히 조성하도록 한 기록은 창경궁에 있던 공사청이었다(『광해군일기』 8년 5월 9일). 공사청에는 국왕의 전교(傳敎) 중 특정 명령을 적어 게시하기도 하였다. 예를 들어 1869년(고종 6) 5월 국왕이 하교하여 조광조(趙光祖)를 비롯해 이황(李滉)·이이(李珥)·성혼(成渾)·송시열(宋時烈)·송준길(宋浚吉) 등 6명 명현의 사판(祀板)이 서울을 지나고, 성균관 유생이 이를 맞이한다면 승정원에서 국왕에게 아뢰도록 명하고, 이를 공사청에 게시하도록 특별히 명령하였다.

고종 연간에 이르면 왕명이 공식적인 비서기관인 승정원(承政院)도 모르게 공사청을 통해서 하달되는 일이 많았다. 그리하여 왕명을 받는 관원들이 궁금한 것이 있어도 어디에 질문해야 하는지를 모르는 일이 발생하였다. 이건창(李建昌)은 이런 이유로 공사청을 사사로이 일을 하는 사인(私人)이라 하며 이를 시정할 것을 건의하였다.

공사청은 1894년(고종 31) 칙령(勅令)에 의거하여 승정원과 함께 혁파되었다(『고종실록』 31년 11월 21일). 당시에 이전의 공문반포 규례를 모두 폐지하고 새롭게 공문처리 규정 등을 제정한 공문식제(公文式制)를 반포하면서 이루어진 조치였다. 공사청이 폐지되면서 종전에 공사청에서 담당하던 ‘계’ 자 날인은 국왕이 몸소 행하였다.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일성록(日省錄)』
  • 『매천야록(梅泉野錄)』
  • 『동학란기록(東學亂記錄)』
  • 『명미당집(明美堂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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