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안역(撫安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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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함길도 지역의 역도 중 하나인 수성도에 속한 역.

개설

무안역(撫安驛)은 조선 세종대에 북방 영토를 개척하며 전국적으로 역로를 재조직하는 과정에서 종성도호부에 신설되어 거산도에 편제되었다. 이후 성종 연간에 『경국대전(經國大典)』의 역도(驛道) 체제하에서 수성도(輸城道)에 포함되었으며 이후 조선시대 후기까지 존속하다가 갑오개혁 때 폐지되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무안역은 1435년(세종 17)에 여진족을 몰아내고 수복한 영북(寧北)에 종성군(鍾城郡)을 설치하면서 신설되었다. 무안역의 신설 과정을 살펴보면, 1432년(세종 14) 영북진(寧北鎭)의 설치를 계기로 북방 영토 개척이 본격화되었고(『세종실록』 14년 6월 14일), 이때 설치된 진보(鎭堡)를 효과적으로 통치하기 위해 이듬해인 1433년(세종 15)에 하삼도(下三道) 지역의 백성들을 이주시켜 역호(驛戶)를 확보하면서 역참이 신설된 것으로 보인다(『세종실록』 16년 6월 18일). 무안역은 이처럼 북방 개척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1435년(세종 17)에 신설되었다.

그런데 신설 초기의 명칭은 무안역이 아니라 백안수소참(伯顔愁所站)이었다. 이후 야인이 사용하던 지명에서 비롯된 역명을 그대로 사용하는 것은 타당하지 못하다는 병조의 지적에 따라 무안역으로 개칭되었다(『세종실록』 17년 9월 26일).

조직 및 역할

영조 때 편찬된 『여지도서(輿地圖書)』 함경도 함경북도 종성부읍지에 따르면, 당시 무안역에 역리(驛吏) 345명, 역노(驛奴) 25명, 역비(驛婢) 17명과 상마 2필, 중마 4필, 하마 9필 등 총 15필의 역마가 배속되어 있었다.

변천

1435년(세종 17) 종성도호부를 설치하면서 신설한 역으로 『세종실록』「지리지」 함길도 종성도호부 조에 무안참으로 기록되어 있다. 무안역은 『세종실록』「지리지」 함길도 조의 역도 및 속역 내역에서는 그 명칭을 찾을 수 없는데, 이는 『세종실록』「지리지」가 1432년(세종 14)에 편찬된 『신찬팔도지리지』를 저본으로 작성되어 1435년(세종 17) 종성도호부와 함께 무안역이 신설된 사실이 반영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무안역은 종성도호부와 함께 신설되어 초기에는 함길도 지역의 거산도에 편입되었던 것으로 보여진다. 이는 야인이 사용하던 지명에서 비롯된 역명을 그대로 사용하는 것은 타당하지 못하다는 거산도찰방의 정장(呈狀)이 병조에 전해진 사실을 통해서 짐작할 수 있다(『세종실록』 17년 9월 26일). 따라서 종성도호부와 함께 세종 17년에 신설된 무안역은 신설과 동시에 거산도에 소속되어 거산도찰방의 통제하에 놓였다고 보여진다.

이후 성종대에 『경국대전』이 반포되면서 확립된 조선시대 전기의 역도 체제에서 무안역은 무령역(撫寧驛)·오촌역(吾村驛)·주촌역(朱村驛) 등 18개 역과 더불어 수성도에 소속되었다. 이후 조선시대 후기까지 존속하다가, 1896년(고종 33) 1월에 대한제국 칙령 제9호 ‘각 역 찰방 및 역속 폐지에 관한 건’에 따라 폐지되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따르면, 무안역은 종성도호부 남쪽 75리 지점에 위치하였으며, 군창(軍倉)을 갖추고 있었다고 전한다. 그에 비해 『여지도서(輿地圖書)』 함경북도 종성부읍지에는 종성도호부 동쪽 70리 지점에 위치해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참고문헌

  • 『고려사(高麗史)』
  •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 『여지도서(輿地圖書)』
  • 조병로, 『한국근세 역제사연구』, 국학자료원,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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