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녕위(東寧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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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나라에서 1386년(고려 우왕 12)에 만주의 요양(遼陽)에 설치한 위소.

개설

동녕위는 요양성 북쪽에 위치한 위(衛)로 성격상 기미위(羈靡衛)에 가깝다. 요양성은 여진계와 조선계, 그리고 한인이 뒤섞여 사는 다민족 도시로 볼 수 있으며 동녕위는 도사(都司)의 성 동쪽에 위치하고 있는 부곽(附郭)이다. 동녕위는 땅의 경계를 확실히 구분하기 위해 명 태조가 설치한 군사 시설이다.

설립 경위 및 목적

동녕위는 원래 조선인이 살았는데, 명조의 세력에 편입되자 한인들과 분리시켜 별도로 성보를 쌓고 거주케 한 것이다.

홍무제는 천하를 평정하자 압록강으로 국경을 삼고 명과 조선의 백성이 서로 왕래할 것을 염려하여 동녕위를 설치해 땅의 경계를 확실하게 구분하였다. 이 지역에 살고 있던 고려인들을 통제하여 조선과의 왕래를 차단하려고 한 것이다. 당시 요동에는 약 50만 명의 인구가 거주하고 있었는데 그중 조선인들은 홍무 연간에 3만여 명, 영락 시기가 되면 만산군(漫散軍) 4만여 명으로 증가하였고, 성종 연간에는 3할을 차지한다고 양성지(梁誠之)는 언급하고 있다. 또한 특수한 상황이기는 하지만 요동과 조선이 접경지역이라는 특성 때문에 임진왜란 이후에는 난을 피한 조선 유민들이 요동으로 흘러 들어간 자가 많았다. 그렇기 때문에 명 태조는 특별히 동녕위를 설치하여 한인과 조선인이 왕래하는 것을 금지하였고, 군역의 의무를 지는 자들에게는 후한 양식의 지급, 세금의 면제는 물론, 더 나아가 조선 출신이 요동에 거주하면 면포를 지급해 주었다. 이렇게 조선인을 우대하지 않을 수 없었던 이유는, 요양에서 압록강까지를 완전하게 영토화하지 못한 상황에서, 요동에 거주하는 조선인의 이탈이나 동녕위에 편성된 조선 출신 군사들의 동요를 방지하기 위한 조처였던 것이다. 반면 조선은 귀부해 온 동녕위 출신자나 조선으로 월경해 오는 자들을 요동도사에 송환하였다. 조선은 국경에서 벌어지고 있는 다양한 문제에 대해 명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조직 및 역할

1380년인 명홍무 13년에 동녕위를 동녕(東寧)·남경(南京)·해양(海洋)·초하(草河)·여진[女直]의 5개 천호소로 편성하여 각부에 고려와 여진을 통할하였다. 동녕은 고려 서북 출신의 유민을, 여진은 원대 요양로 등지에 거주하던 여진을, 남경은 두만강 북쪽 국자가 부근을, 해양은 고려의 동북면 길주, 초하는 봉양성의 북방, 초하상류의 초하성을 가리킨다. 동녕위는 귀부한 고려·여진의 관민으로 5정(丁)에 1정의 비율로 군사를 편성하여 설치하고, 동녕·남경·해양·초하·여진의 5개의 천호소를 설치하여 여기에 나누어 예속시켰다. 이후 동녕위를 고쳐 좌소(左所)·우소(右所)·중소(中所)·전소(前所)·후소(後所)를 설치하였다. 한군(漢軍)은 중소(中所)에 속하게 하고, 고려와 여진은 나머지 4소(所)에 편성하였다. 요동도사 관할하의 25개 위(衛) 중에서 조선과 깊은 관련을 맺고 있는 것이 동녕위이다. 동녕위는 명조가 조선을 견제하기 위해 설치한 것으로 명 초부터 중기에 걸쳐 외교사절과 통사를 배출하였다. 동녕위 출신이 통사를 담당하였다는 것은 궁극적으로는 이들이 조선과의 외교 관계에 활약하였음을 짐작게 한다. 실제로 요동도사의 문서를 조선에 전달하는 역할을 담당하였는데, 이 경우 천호·백호 등 위소관을 파견하여 전달하였다.

동녕위의 또 하나의 임무는 중국에서 조선으로 들어가는 사신을 수행하거나 만산군여(滿散軍余)나 그 가속(家屬)을 요동으로 호송하는 것이었고, 또 조선 사행의 연회를 주관하기도 하였다.

변천

명대의 요양 동녕위는 본래 동녕·남경·해양·초하·여진의 5개 천호소를 관할하는 기관으로 1380년(명홍무 13)에 처음 설치되었다가, 1386년(명홍무 19) 7월에 개설되었다. 1384년(명홍무 17)에 해양 천호소를 설치하여 반도 동북부를 관할하였고, 1385년(명홍무 18)에 남경 천호소를 설치하여 연산관외 등지를 관할하였으며, 1386년에 동녕위를 설치하여 좌·우·중·전·후 5개 천호소를 관할하게 하였다.

참고문헌

  • 高興·徐日範, 「明代의 遼陽東寧衛 世襲指揮使에 대한 고찰」, 『고구려발해연구』1, 고구려발해학회, 1995.
  • 서인범, 「명대의 요동도사(遼東都司)와 동녕위(東寧衛)」, 『명청사연구』23권, 명청사학회,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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