객호(客戶)

sillokwiki
Silman (토론 | 기여) 사용자의 2017년 12월 10일 (일) 01:40 판 (XML 가져오기)

(차이) ← 이전 판 | 최신판 (차이) | 다음 판 → (차이)
이동: 둘러보기, 검색



살던 곳을 떠나 다른 지방에서 옮겨와서 사는 호(戶), 또는 남의 논밭을 병작(幷作)하는 호.

개설

객호(客戶)는 중국사에서 쓰이는 용어이지만 조선시대의 협호(挾戶)와 유사하다고 볼 수 있다. 협호는 중국의 객호와 마찬가지로 본향(本鄕)을 떠나 타향으로 흘러온 유이민으로 추정된다. 객호는 조선후기에 도시뿐 아니라 농촌 지역에 광범위하게 존재하였다. 이들은 도시와 농촌의 주호(主戶)에 우거하였는데, 주호와의 관계는 혈연관계인 경우도 있고, 혈연관계가 아닌 경우도 있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객호는 주호에 상대되는 용어로 중국사에서 등장하는 용어이다. 당대(唐代)의 경우 주호는 본향 즉 본래 살던 거주지에 토착한 호를 가리키고, 객호는 본향을 떠나 유리하다가 타향으로 옮겨와서 사는 호를 가리킨다. 송나라 때 이후 토지 소유 유무가 주호와 객호를 나누는 주요한 기준이 되어, 주호는 양세(兩稅)와 차역(差役)을 부담하는 토지호, 즉 상산호(常産戶)인 데 반해 객호는 양세와 차역을 부담하지 않는 무산호(無産戶)를 의미하였다.

조직 및 역할

조선시대 주호와 협호의 관계와 관련해 친족 및 신분별 다양한 관계가 수직적인 상하관계로 편제된 것이 주호-협호라는 호의 구조라고 볼 수 있다. 주호-협호 관계에서 협호는 국가의 직접 지배를 받지 않는 대신 주호의 지배를 받는 예속 노동력과 종속 소작인으로 해석된다. 또한 호적대장상의 주호-협호 관계는 단순한 가옥의 임차관계나 동거상태를 나타내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으며, 주호-협호 관계를 집주인인 가주(家主)와 차입자(借入者)로 규정할 수 있다. 이외에 주호-협호의 대칭관계 자체를 부정하고, 협호를 독립적인 경영주체로 파악하면서 주호에 예속된 존재가 아니며, 조선후기 호가 자연호(自然戶)가 아니라 몇 개의 자연가를 국역(國役) 부담을 위해 편제하였다고 볼 수도 있다. 협호가 중국의 객호와 마찬가지로 유민(流民)으로 타향에 흘러들어온 교우호(僑寓戶)에서 유래했다고 추정되며, 조선후기의 협호는 농촌지역의 경우 주호의 예속노동력이나 종속 소작인을 형성하지만, 도시의 경우 농업 외에 상공업, 고역(雇役) 등에 종사하는 임노동자가 많거나 혹은 관리, 과거 준비 등 특수 목적을 위해 상경하여 단지 주호의 가옥 일부를 임차하는 자들도 존재하고 있었다.

변천

조선전기 함길도의 경우 경원, 경흥에 거주하는 자를 원거(元居) 및 객호로 나누어 기록하게 하였는데, 이는 객호를 다른 지역에서 이 지역으로 옮겨온 호로 본 것이다. 또한 평안도 귀성(龜城) 지역으로 새로 이사한 민들이 처음에 농사를 짓지 못해 어려울 것을 걱정하면서 원거인(元居人)에게 객호를 나누어 의탁하게 하였다. 따라서 특정 읍의 호수(戶數)를 산정할 때 원호(元戶)와 객호를 나누어 파악하였다. 그리고 통법(統法)을 시행할 때 통(統) 안에 객호를 받아들여 살지 못하도록 다스리는 일이 중요하다고 지적하고 있었다. 경우에 따라서는 객호로 유입된 자들을 군제에 편입하여 본토에서 원래 살던 자들과 잘 어울리게 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하였다.

참고문헌

  • 김희호·이정수, 「조선후기 挾戶의 존재 형태와 노동 특성」, 『역사와 경계』83, 부산경남사학회, 2012.
  • 이영훈, 「조선후기 농민경영에서 주호-협호관계」, 『조선후기 사회경제사』, 한길사, 1988.
  • 임학성, 「조선후기 한성부민의 호구문서에 보이는 ‘협호’의 성격」, 『조선사연구』7, 1998.
  • 정진영, 「조선후기 ‘호’의 새로운 이해와 전망」, 『대동문화연구』42,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 2003.
  • 한영국, 「조선후기의 협인·협호: 언양현 호적대장의 협호구를 중심으로」, 『천관우선생환력기념한국사학논총』, 정음문화사, 1979.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