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부(豆腐)
주요 정보 | |
---|---|
대표표제 | 두부 |
한글표제 | 두부 |
한자표제 | 豆腐 |
동의어 | 두포(豆泡), 태포(太泡), 포(泡) |
관련어 | 연포(軟泡) |
분야 | 생활·풍속/식생활/음식 |
유형 | 음식 |
지역 | 대한민국 |
시대 | 조선 |
집필자 | 김상보 |
재료 | 대두(大豆)·간수·물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두부(豆腐)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세종실록』 10년 2월 11일 |
콩을 물에 담갔다가 갈아 베자루에 넣고 짜낸 후 간수를 넣고 물기를 뺀 다음 응고시킨 식품.
개설
물에 불린 콩을 맷돌로 갈아 베자루에 넣고 짠 다음 그 물을 끓여 간수를 쳐 엉기게 하고는 보자기에 싼 후 무거운 것으로 눌러서 물기를 빼고 네모지게 잘라 낸 식품이다. 두포(豆泡)·포(泡)·태포(太泡)라고도 한다. 소선(素膳)의 대표 식품이다.
만드는 법
콩 1말을 맷돌에 타서 껍질을 없애고 또 별도로 녹두 1되를 타서 껍질을 없앤 다음 물에 담가 흠뻑 불린다. 건져서 맷돌에 천천히 곱게 갈아 찌꺼기가 없도록 발이 고운 베주머니에 넣고 걸러낸다. 다시 한 번 더 걸러서 솥에 담아 끓이는데 넘치면 냉수를 솥 가장자리를 따라 천천히 붓는다. 대개 3번 넘치고 3번 물을 부으면 익는다. 익으면 냉수를 섞어 심심하게 한 염수(鹽水)를 천천히 붓는다. 너무 조급하게 부으면 단단해져서 좋지 않다. 엉기면 베주머니에 넣고 판판한 곳에 담아 그 위를 고르게 누른다.
연원 및 용도
두부(豆腐)의 기원은 중국 북방 유목민족이 만들어 먹던 유부(乳腐)일 것으로 여겨진다. 우유나 양유의 단백질을 효소나 산으로 뇌수(腦髓)처럼 연하고 물렁물렁하게 응고시킨 것이 유부인데 요즘 말하는 요구르트(youghurt)이다. 즉, 우유 단백질을 응고시킨 것 중 수분이 많은 것은 유부, 수분이 없으면 치즈(cheese)가 되는 것이다.
중국의 중원(中原)에서는 목축이 성하지 않았다. 우유나 양유가 부족한 까닭에 값비싼 이들 대용품으로 두유(豆乳)를 이용하여 두부를 만들었다. 그 시기는 당대(唐代) 중기라는 설이 있다. 유부와 두부의 차이는 유단백질(乳蛋白質)이냐 대두단백질이냐인 것이다.
불교를 국교로 삼았던 고려시대에는 절을 중심으로 두부 제조가 성행하였다. 이의 유습으로 돌아가신 왕과 세자의 묘인 여러 능원(陵園)에 있는 승원(僧院)이 있어 여기에서도 제물로 올리는 두부를 만들었다. 이런 승원은 조포사(造泡寺)라 하였다. 유교를 표방한 조선시대에 이르러서 두부 제조는 점차 절에서 민간에게로 옮겨왔다. 하지만 소문난 두부는 연도사(衍度寺) 두부, 봉선사(奉先寺) 두부처럼 절 이름을 붙였다. 허균(許筠)이 지은 『성소부부고(惺所覆瓿藁)』의 「도문대작(屠門大嚼)」에는 “창의문(彰義門) 밖 사람이 잘 만든다. 그 연하고 매끄러운 것은 이루 말할 수 없다.” 하였다. 창의문은 서울 서북쪽에 있는 성문이다.
조선의 두부 만드는 기술은 중국에서도 인정할 정도로 뛰어났다. 1428년(세종 10) 사신으로 명나라로 간 백언(白彦)이 음식을 만드는 여자인 찬녀(饌女)를 시켜 두부를 만들어 명 황제에게 올리자 명 황제는 백언을 어용감(御用監) 소감(小監)으로 제수(除授)하고 관대(冠帶)를 내려주었다(『세종실록』 10년 2월 11일).
조선시대에는 다양한 두부가 있었다. 간수로 엉기게 한 것에 생강·청장·후추를 넣고 베주머니에 담아 응고시키고 삶아 낸 두부는 여행하는 사람을 위한 두부였다. 또 새끼로 묶어 들고 다닐 만큼 단단한 막두부, 처녀의 고운 손 아니고는 문드러진다는 연두부, 끓여서 막 건져낸 순두부, 삼베로 굳히는 베두부, 명주로 굳히는 비단두부, 두유를 넓적한 냄비에 붓고 가열하여 표면에 생기는 피막(皮膜)을 건져내 만드는 두부피(豆腐皮) 등이 있었다.
일반적으로 두부는 두포 또는 포라고 불렀다. 그래서 연두부는 연두포(軟豆泡)라 했다. 편두포(片豆泡)와 연두포로 찜·구이·탕 등 각종 찬품을 만들어 위로는 왕에서부터 아래로는 서민에 이르기까지 널리 애식하였다.
1795년(정조 19)은 장헌세자(莊獻世子)와 혜경궁홍씨가 회갑이 되고 정조의 즉위 20년 등 경사가 겹치는 해였다. 이에 화성(華城: 현 수원)의 장헌세자의 묘인 현륭원(顯隆園)으로 행행(行幸)하였는데, 이때 정조와 혜경궁홍씨의 수라상에 오른 찬품 중 하나가 태포탕(太泡湯)이다.
두부로 만든 탕은 시식음식으로도 발전하였다. 홍석모(洪錫謨)가 1849년(철종 1)에 쓴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에 의하면, 연포탕(軟泡湯)이 음력 10월의 시식이었다.
“두부를 잘게 썰어 꽂이에 꿰어 기름에 지져 닭고기와 함께 국을 만드는데 이것을 연포라 한다. 포는 두부를 말하는데 회남왕(淮南王)으로부터 시작된 것이다. 육방(陸放)의 시를 보면 촉인(蜀人)이 두부를 여기(黎祈)라 하였으니 지금의 연포가 이것이다.”
생활 민속적 관련 사항
두부는 색깔이 하얗고 재료도 식물성인 콩으로 만드는 까닭에, 소선의 대표 식품이 되었다. 1634년(인조 12)에 청나라 사신이 왔을 때 이들에게 소선의 하나로 대접한 것이 편두포전증(片豆泡煎蒸)이다. 두부를 편으로 잘라 참기름에 지져 찜한 것이다.
조선왕조는 여러 능침(陵寢) 제례, 선원전(璿源殿) 제례, 영희전(永禧殿) 제례, 현륭원 제례, 각 원(園) 제례 등에서 백증(白蒸)이라는 찬품단자명(饌品單子名)으로 두포탕을 제물로 올렸다. 두부를 재료로 하여 만든 소선은 민중의 불교 공양이나 유교식 제례에도 빠질 수 없는 제물이었다.
참고문헌
-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
- 『성소부부고(惺所覆瓿藁)』
- 『소문사설(謏聞事設)』
- 『수운잡방(需雲雜方)』
- 『영접도감의궤(迎接都監儀軌)』
- 『원행을묘정리의궤(園幸乙卯整理儀軌)』
- 『조선요리제법(朝鮮料理製法)』
- 『태상지(太常誌)』
- 김상보, 『음양오행사상으로 본 조선왕조의 제사음식문화』, 수학사, 1996.
- 김상보, 『조선왕조 궁중의궤 음식문화』, 수학사, 1995.
- 김상보, 『한국의 음식생활문화사』, 광문각, 1997.
- 이성우, 『한국요리문화사』, 교문사, 199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