척후군(斥候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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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에 전투가 벌어질 곳의 지형과 적의 형편을 정탐하고, 왕이 왕릉·종묘·사직(社稷) 등에 거둥할 때 정찰을 담당하던 군대.

개설

척후군은 1473년(성종 4) 5월의 기록 등에서 확인되지만, 설치된 연도를 정확히 알 수는 없다. 척후군은 5명에서 2초(哨)로 구성되었는데, 초는 약 100명을 단위로 하는 군대 편제다. 조선전기에는 여진족을 정벌할 때 지형과 적의 형편을 정탐하는 임무를 수행하였다. 그러다가 척후군은 1728년(영조 4) 무신란(戊申亂)을 계기로 왕이 왕릉·사직 등에 행차할 때에도 정찰의 임무를 담당하였으며, 활·총·포 등의 시험을 통해 활·무명[木] 등을 상으로 받았다. 척후군은 1894년(고종 31)의 갑오개혁과 1895년의 을미개혁으로 조선후기 중앙군과 지방군이 혁파될 때 함께 폐지된 것으로 보인다.

담당 직무

조선전기 척후군은 여진족을 정벌할 때 전투가 벌어질 곳의 지형이나 적의 형편을 정탐하였다. 실제로 1479년의 원정에 앞서 1478년(성종 9) 군관(軍官)이나 만호(萬戶)로 글을 알고 지혜가 있는 자를 골라 건장하고 용감한 토병(土兵) 5~6명을 거느리고 여러 길로 나누어 정탐하도록 하였다(『성종실록』 9년 8월 25일). 척후군은 활과 화살[弓矢]을 소지하였고, 추울 때 척후군에게는 겨울옷이 지급되었다. 척후군은 때로 군공(軍功)을 노리고, 사냥이나 고기잡이를 하려는 여진족을 잡아 목을 베는 잘못을 저지르기도 하였다(『중종실록』 25년 1월 14일).

아울러 척후군은 1728년(영조 4)에 무신란이 발생하였을 때 죽산(竹山)에 배치되었고, 1728년 이후에는 왕이 왕릉·종묘·사직 등에 행차할 때에도 정찰을 담당하였다. 실제로 1789년(정조 13) 왕이 거둥할 때 수어청 척후군은 홍제원에서 검암점막(黔巖店幕)까지 6곳을, 금위영·어영청의 척후군은 좌우에서 장교 1명, 병졸 4명으로 5명이 1조를 이루어 왕이 궁궐을 벗어나 도성 안에서 밤을 지낼 때는 14곳, 종묘·사직에 거둥할 때는 7곳을 숭례문 위쪽 높은 곳 등에서 정찰하였다.

척후군에게는 죽 등의 음식이 제공되었고, 장교는 활쏘기, 그리고 군졸은 조총 쏘기를 시험하여 활이나 무명을 받았고 과거 시험의 최종 시험인 전시(殿試)에 곧바로 응시할 수 있는 자격, 곧 직부전시(直赴殿試) 등의 혜택을 주기도 하였다.

변천

척후군은 1473년 5월의 기록 등에서 확인되지만, 설치된 연도를 정확히 알 수는 없다. 척후군은 조선전기에는 여진족과 관련하여 미리 전투가 벌어질 곳의 지형이나 적의 형편을 정탐하는 것을 주된 임무로 하였는데, 1728년을 계기로 척후군은 왕이 왕릉이나 종묘·사직 등에 행차할 때에도 정찰을 담당하였다. 아울러 수어청의 경우, 1784년 영릉(永陵) 행차 때부터 척후군의 배치 숫자를 20명인 곳은 7명, 10명인 곳은 4명, 5명인 곳은 2명 축소했다. 척후군은 1894~1895년 추진된 갑오개혁과 을미개혁 때 조선후기 중앙군과 지방군이 혁파되면서 함께 폐지된 것으로 보인다.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
  • 『일성록(日省錄)』
  • 『만기요람(萬機要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