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과(司果)

sillokwiki
Silman (토론 | 기여) 사용자의 2017년 12월 10일 (일) 00:58 판 (XML 가져오기)

(차이) ← 이전 판 | 최신판 (차이) | 다음 판 → (차이)
이동: 둘러보기, 검색



조선시대 중앙의 오위(五衛)에 소속된 정6품 서반직.

개설

1466년(세조 12) 관제 정비 당시 등장한 직제이며, 고려 때부터 조선초까지 부사직(副司直)으로 불리던 것을 사과(司果)로 고치면서 법제화되었다. 병조의 지시에 따라 궁성문과 도성 문을 파수하였으며, 문의 개폐에도 관여하였다. 양난 이후 오위제(五衛制)가 유명무실해지면서 관명만 남아 문반이나 무반 중에 현직이 없는 자나 기타 잡직에 있는 자들에게 녹을 주기 위한 구실로 활용되었다.

담당 직무

1466년에 관직을 대대적으로 정비했을 때 부사직에서 사과로 고치면서 비로소 성립되었다(『세조실록』 12년 1월 15일). 원래 부사직은 조선 건국 직후에 문무 관제를 처음으로 정하면서 훈련관(訓鍊觀)의 종6품 관직으로 설치되었다. 그런데 1394년(태조 3)에 정도전의 주도로 군제를 개편하면서 고려의 유제(遺制)로 간주되었던 낭장(郎將)을 부사직으로 고쳤다. 낭장은 정6품으로 200명씩으로 구성되는 단위 부대의 지휘관으로 알려져 있다. 이로 인해 혼선이 일어나는 것을 방지하고자 1409년(태종 9)에 훈련관의 부사직을 주부(注簿)로 고쳤다. 이 조치를 계기로 부사직은 주로 무반직으로 기능하게 되었다.

한편 귀화한 왜인(倭人)이나 야인(野人)에게 제수하는 사례도 많았다. 외국인이 관직을 구했을 때 문반직을 선뜻 주기가 어려울 경우에 내려주었다. 고려말기부터 조선초기까지 행정적·군사적 요충지에 대한 효율적인 지방 통제와 군사적 방어 조직의 강화를 위하여 설치한 특수한 지방 관제인 토관(土官)의 서반직에도 설치하였다. 또 궁중의 정원을 담당하는 상림원(上林園)의 벼슬로 두기도 했으나 1449년(세종 31)에 유품(流品)과 같아서 곤란하다며 부사직을 부관사(副管事)로 고쳤다. 무반직 명칭으로 일원화하기 위한 시도였다.

세조 때 들어와 중앙군 조직을 5위제로 개편한 뒤, 1466년에 대대적으로 관직을 정비하면서 섭사직을 부사직으로, 그리고 기존의 부사직은 사과로 고쳤다. 이를 계기로 정식으로 성립되었다.

변천

『경국대전』에서는 정6품, 정원 15명으로 규정되었다. 그리고 사직 등과 더불어 오원(五員)의 일원으로 병조에서 배당하는 군사들을 인솔하여 궁성문과 도성 문을 파수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흥인문·숭례문·돈의문·동소문의 경우에는 호군(護軍)으로 하여금 인솔하여 지키게 했으며, 그 나머지 문들은 오원들로 하여금 맡아서 파수하게 했다. 한편 도성 문은 호군과 오원이 열고 닫으며 교대 시에는 병조에서 열쇠를 수납하도록 했다. 그리고 봉수로부터 받은 전달 사항을 경중에서는 오원이 맡아서 병조에 보고하도록 했다.

양난 이후에 5위의 기능이 마비되었는데 호군 이하는 관명(官名)만 유지하면서 녹과(祿窠)를 줄여서 승진 또는 강등하여 내부(來付)한 각색(各色) 인원(人員)을 대우하도록 했다. 사과의 경우 『속대전』에서는 정원이 6명 늘어나 21명이 되었다. 모두 녹봉은 있으나 실무는 없는 원록체아(原祿遞兒)로 규정되었다.

참고문헌

  • 『경국대전(經國大典)』
  • 『속대전(續大典)』
  • 민현구, 『조선초기의 군사제도와 정치』, 한국연구원, 1983.
  • 천관우, 『근세조선사연구』, 일조각, 1979.
  • 윤훈표, 「5위체제의 성립과 중앙군」, 『한국군사사 5 조선전기Ⅰ』, 육군본부, 20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