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검군(槍劍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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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후기 금위영에 속한 표하군(標下軍) 가운데 왕의 행행 등에 호위를 담당하였던 병종.

개설

창검군은 금위영(禁衛營)에서 여러 임무를 담당하는 각종 표하군(標下軍) 중 하나인 좌·우아병(左·右牙兵)에 소속되어 있는 병종이었다. 좌·우아병 각 70명 중 창검군은 50명씩 모두 100명이 편성되어 있었다. 창검군은 금위영의 원군(元軍) 가운데 선발된 정예 군병이라고 할 수 있다. 창검군의 정확한 창설 시기는 알 수 없으나 좌·우아병이 금위영 창설 초기부터 있었던 것을 고려하면 금위영 창설 이후 그다지 멀지 않은 시기에 창설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1755년(영조 31) 영조가 정순왕후(貞純王后)와 가례(嘉禮)를 행할 때의 『가례도감의궤(嘉禮都監儀軌)』「반차도(班次圖)」에서 창검군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으므로 그 이전에 창설된 것은 분명하다. 창검군은 왕이 거둥할 때 뒤쪽에서 세 줄로 호위를 담당하는 경우가 많았으므로 난후창검군(攔後槍劍軍)이라는 명칭으로 불리는 경우가 많았다.

담당 직무

창검군은 왕이 교외(郊外)나 도성 안을 거둥할 때, 또는 대전좌(大殿座)에 나와 앉아 있을 때에 왕 뒤의 호위를 주로 담당하였다. 그리고 왕이 거둥하다가 밤을 새울 경우에는 이들이 협연군(挾輦軍)처럼 등(燈)을 달고 호위하였다(『정조실록』 2년 2월 24일). 이 외에도 왕세자의 거둥을 배위(陪衛)할 경우에도 수십 명의 창검군을 선정하여 호위를 담당하도록 하였다(『순조실록』 27년 3월 21일).

변천

1777년(정조 1) 10월에는 창검군을 금위영의 본영(本營)에 소속시키고 왕이 거둥할 때 금위영의 파총과 초관 1명씩이 나누어 거느리고서 본영의 지휘를 받도록 하여 지휘 체계를 정비하였다. 이후 창검군은 왕 호위의 주요 군병으로 중요성이 매우 높아져 환위군(環衛軍)을 대신하게 되었다. 금위영에 속하였던 창검군은 1793년 1월 정조가 장용영(壯勇營)을 확대·강화하면서 장용영 소속으로 바뀌게 된다(『정조실록』 17년 1월 25일). 그러나 정조 사후 장용영이 혁파되면서 다시 금위영 소속으로 바뀌었다. 1808년(순조 8)에는 창검군의 조총(鳥銃) 사격 능력을 매년 2월 시험한 후 상품을 궁중에서 지급하였는데, 시험 일자는 2월 1일 선전관이 왕에게 아뢰면 왕이 정하였다.

창검군은 1884년 8월 말 어영청 등 4개의 중앙 군영을 폐지하고 그 병력을 새로이 창설된 친군(親軍) 4영에 이속시킴으로써 폐지되었다.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
  • 『일성록(日省錄)』
  • 『대전회통(大典會通)』
  • 『만기요람(萬機要覽)』
  • 『가례도감의궤(嘉禮都監儀軌)』
  • 『금위영등록(禁衛營謄錄)』
  • 차문섭, 『조선시대 군제 연구』, 단국대학교출판부, 19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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