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무사(鄕武士)
주요 정보 | |
---|---|
대표표제 | 향무사 |
한글표제 | 향무사 |
한자표제 | 鄕武士 |
관련어 | 향군(鄕軍), 장용영(壯勇營), 화성(華城) |
분야 | 정치/군사·국방/편제 |
유형 | 직역 |
시대 | 조선 |
왕대 | 조선 |
집필자 | 서태원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향무사(鄕武士)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정조실록』 21년 12월 30일, 『정조실록』 15년 5월 10일, 『정조실록』 17년 1월 12일 |
조선후기 향촌에서 전쟁·반란을 대비하는 것을 주요 임무로 하던 지방의 무사.
개설
향무사는 영조대의 기록에서 그 존재가 확인되지만, 언제 처음 설치되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향무사는 공홍도와 전라도 순천부의 별초무사나 황해도 추포무사처럼 지방에 설치되어, 전쟁·변란을 대비하고 중국인의 불법 고기잡이 행위 등을 방지하는 역할을 담당하였다. 하지만 장용영 소속 향무사는 상번(上番)하여 조련을 받으면서 숙직과 어가의 호위도 담당하였고, 화성(華城) 성역(城役)의 감독은 물론이고 1796년(정조 20) 화성이 완공된 후 화성을 방어하는 임무도 수행하였다. 이러한 임무를 담당한 향무사는 번상을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가기 직전 활쏘기 시험을 통해 과거 시험의 최종 시험인 전시(殿試)에 곧바로 응시할 수 있는 자격, 곧 직부전시(直赴殿試) 등의 혜택을 제공받았다. 1802년(순조 2) 장용영이 혁파된 후 장용영 향무사도 폐지되었고, 지방의 감영·수영 등에 설치된 향무사도 1895년(고종 32) 지방군이 혁파되면서 함께 폐지된 것으로 보인다.
담당 직무
향무사는 전쟁·변란을 대비하고, 해적의 약탈이나 중국인의 불법 고기잡이 행위 등을 방지하기 위해 지방에 설치되었다. 즉 1728년 무신란(戊申亂)을 겪은 후 공홍도 감영에, 그리고 1866년(고종 3) 병인양요 후에 전쟁을 대비하기 위해 전라도 순천부에 별초무사를 두었다. 1736년(영조 12)에는 황당선(荒唐船)의 불법적인 고기잡이를 금지시키기 위해 황해도 연해의 요해처에 추포무사를 설치하였다.
특히 1793년(정조 17) 장용영 향무사 13명은 읍리(邑吏) 13명과 함께 향군(鄕軍) 13초(哨)를 구관(句管)하는 감색(監色)의 역할을 하였고, 상번하여 조련을 받으면서 숙직을 하고 왕의 행행(幸行) 때 어가를 호위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임무를 수행한 수원·파주·양주·지평·양근·가평·고양 등의 향무사는 하번하기 직전 유엽전(柳葉箭)을 쏘는 활쏘기 시험을 통해 3중(中) 4분(分)인 경우 출신(出身)은 품계를 높여 주고, 이미 품계를 높여 주었으면 변장(邊將)에 제수하며, 한량(閑良)은 직부전시의 혜택을 주었다. 그런 다음 성적에 따라 통개(筒箇) 1부(部), 과거 시험 가운데 회시(會試)에 곧바로 응시할 수 있는 자격인 직부회시(直赴會試), 아마첩(兒馬帖), 궁시(弓矢) 1부, 궁전(弓箭) 1부, 상현궁(上弦宮) 1장(張), 화살의 몸이 되는 대인 전죽(箭竹) 100개 중 하나를 상으로 제공하였다.
아울러 1793년(정조 17) 장용영 내·외영 제도가 성립되고 1796년 화성(華城)이 완공되면서 왕이 행행(幸行)할 때 내영의 향무사 47명은 수첩군관이 되어 화성을 지켰고(『정조실록』 21년 12월 30일), 평시에 외영으로 입번(入番)하는 향무사는 입방군(入防軍)인 향군(鄕軍) 3명을 병졸로 거느리고 화성의 담장 안팎과 성 위를 파수(把守)하는 역할을 담당하였다.
변천
향무사는 1760년(영조 36)의 『승정원일기』 기록 등에서 확인되지만, 언제 처음 설치되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장용영의 경우 1791년(정조 15) 장용영에 소속된 향무사가 있는 읍에 새로 인쇄한 『병학지남』을 보내 무예를 열심히 익히도록 한 것을 통해, 향무사가 설치되었음을 알 수 있다(『정조실록』 15년 5월 10일). 실제로 장용영 향무사는 1793년 장용청이 설치될 때 13명을 두었으며(『정조실록』 17년 1월 12일), 1797년 왕이 행행할 때 내영의 향무사 47명이 화성의 수첩군관이 된 것에서 향무사의 수가 많아졌음을 알 수 있다.
아울러 1795년 이후 향군 중 활쏘기나 조총 쏘기에서 성적이 우수하여 곧바로 전시나 회시에 응시하게 되면 그들도 향무사로 부르게 되면서 향무사의 수가 더욱 많아졌으며, 출신(出身)이나 한량(閑良)이 주축을 이루었던 향무사의 신분도 변화하였다.
하지만 1802년(순조 2) 장용영이 혁파되면서 장용영 향무사도 함께 폐지되었고, 1804년 전시(殿試)에 응시하지 않은 장용영 향무사 김상복의 기록을 마지막으로 장용영 향무사에 대한 내용이 보이지 않는다.
한편 감영이나 수영 등에 설치된 향무사는 1895년 을미개혁 때 지방군이 혁파되면서 함께 폐지된 것으로 보인다.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
- 『일성록(日省錄)』
- 『장용영대절목(壯勇營大節目)』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