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군색(二軍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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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후기 기병과 보병의 보포 및 대궐 안팎에 고립 인원을 관리하는 병조 소속의 관서.

개설

원칙적으로 기병(騎兵)은 1호를 4명으로, 보병(步兵)은 1호를 3명으로 편성하였다. 서울에서 번을 서는 상번(上番)은 1년에 6번으로 나누어 수행되었는데, 궁궐과 종묘·사직·전·궁 등에서 파수를 섰다. 상번하지 않는 기병과 보병에게는 군포를 징수하여 각 소속 관청의 재정에 충당하였다.

담당 직무

모든 관청 원역의 급료는 호조에서 받고, 군포는 병조에서 받았다. 이것을 각각 호료(戶料)와 병포(兵布)라고도 하였다. 상번하지 않는 기병과 보병의 총수는 94,872명이었다. 이들에게 보포(保布)를 징수하였는데, 간혹 돈이나 삼베로 내는 것도 허용하였다. 이에 따라 경기도와 강원도는 전부 돈으로, 삼남 지방과 황해도는 돈과 무명을 반반씩, 경상·전라도의 일부 읍에서는 삼베로, 그 밖의 지역은 무명으로 바치게 하였다.

이군색에는 상번군을 배정하였다. 공문을 발송하여 각 도의 병영에 지시하면 복무하는 군병은 모두 호(戶) 안에서 포를 징수하여 여비와 행장을 마련하였다. 상경한 당번군을 전달 25일에 이군색당상관이 도총부당상관과 합석하여 도별로 나누어 일일이 점검한 뒤 위장소(衛將所)로 내려 보냈다. 위장소에서는 그들이 복무할 곳을 배정하여 파송하였다.

그러나 당번병이라 할지라도 복무당번의 기한까지 도착하지 못하는 자에게는 무명 2필 이상을 변상시켰다. 그중 2/3는 병조에, 나머지는 이군색에 지급하여 경비에 충당하였다. 이군색 정랑이 이러한 출납업무를 전담하였다. 매년 초에 전년도의 수입과 지출을 결산한 뒤 예산안을 만들고, 그에 대한 간단한 의견을 덧붙여[附箋] 보고한 뒤 집행하였다.

변천

1750년(영조 26) 균역법의 시행으로 양역에 부과하는 군포의 필수가 절반으로 줄었다. 균역법 이전에는 8번 교대로 1명당 2필이던 것을 1필로 감한 것이었다. 1764년(영조 40) 파주에 방어영(防禦營)이 설치된 후 영의 기병과 보병이 납입하는 포가 부족하자, 균역법 시행 후 줄어든 군포수를 균역청(均役廳)에서 지급하였다.

참고문헌

  • 『대전회통(大典會通)』
  • 『만기요람(萬機要覽)』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