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녀(醫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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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내의원과 혜민서에 소속되어 부인들의 질병을 구호·진료한 여성 의료인.

개설

의녀 제도는 1406년(태종 6)에 검교한성윤지제생원사(檢校漢城尹知濟生院事) 허도(許衜)의 건의에 따라 제생원(濟生院)에 처음으로 설치되었다(『태종실록』 6년 3월 16일). 성리학적 사회에서 남성 의료인을 꺼리는 부인들의 진료를 위해 계집종을 선발하여 『맥경(脈經)』과 침구(鍼灸)의 법을 가르쳤으며, 이후 부인과(婦人科), 『산서(産書)』 등을 교육하여 진료에 나설 수 있게 하였다. 의녀는 내의원과 혜민서에 소속되어 의료 업무에 종사하였으며, 그 밖에는 본래 소속된 지역으로 돌아가 대민 의료 활동을 하였다.

담당 직무

처음에는 창고(倉庫)나 궁사(宮司) 소속의 계집종 가운데에서 어린아이를 뽑아 교육하였다. 이후 외방(外方) 각도 계수관(界首官)의 계집종 중에 영리한 어린아이를 선택하여 침구술과 약이법(藥餌法)을 가르쳐 그 술법을 습득시킨 뒤에 지방으로 되돌려 보내어 부인들의 병을 치료하게 하였다(『세종실록』 5년 12월 4일).

세종 때에는 의녀의 수를 확대하기 위한 조치가 계속 취해졌으며, 세조와 성종대에는 의녀의 교육을 강화하기 위한 다양한 조치들이 행해졌다. 교육은 혜민서가 문리 터득 위주로 기본적인 의학 교육을 담당하였고, 내의원에서 보다 전문적인 교육을 맡았다. 당시 의녀들이 익혀야 하는 의서로 『인재직지맥(仁齋直指脈)』, 『동인침혈침구경(銅人鍼穴鍼灸經)』, 『가감십삼방(加減十三方)』, 『태평혜민화제국방(太平惠民和劑局方)』, 『산서』가 정해졌으며, 매달 방서(方書)·진맥(診脈)·명약(命藥)·점혈(點穴)을 교육받고 시험을 치렀다(『성종실록』 9년 2월 16일). 의녀들의 교육은 기본적으로 부인과를 위주로 하였지만 『가감십삼방』을 비롯하여 다양한 의서를 수업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이를 통해 전문적인 의료인으로 활동할 수 있는 자질을 갖추었다.

한편 1478년(성종 9)에는 예조(禮曹)에서 의녀를 권장하기 위하여 성적에 따라 내의녀(內醫女)·간병의녀(看病醫女)·초학의녀(初學醫女)의 세 등급으로 나누고 등급에 따라 학업과 진료에 차등을 두었다. 또한 나이가 40이 되도록 한 분야에 정통하지 못하면 본역(本役)으로 환송하는 등 강력한 조치를 취하였다.

의녀의 업무는 소속 기관과 담당 업무에 따라 구분되었는데, 크게는 내의원과 혜민서가 중심이었고, 교육을 마치고 지방으로 돌아가 활동하는 의녀도 있었다. 내의원에는 차비대령의녀(差備待令醫女)와 내의녀가 구분되었는데, 『속대전』에 따르면 차비대령의녀는 10명이며 내의녀는 12명이었다. 이들은 모두 내의원에 속하였지만 차비대령의녀만이 왕실의 진료에 참여하였다. 내의녀는 진료를 하지 않고 내의원에 소속되어 지속적으로 교육을 받으면서 차비대령의녀를 보좌하고 궁녀, 나인 등을 치료한 것으로 보인다. 특히 차비대령의녀 가운데 가장 뛰어난 의녀는 행수의녀(行首醫女)로 불렸는데, 내의원의 수의(首醫)와 같은 의미였다.

한편 70명의 의녀가 있었던 혜민서에는 내의 2명과 간병의 20명, 그리고 초학의가 있었는데, 초학의는 교육을 받는 의녀였다는 점에서 진료는 내의와 간병의에 의해서 이루어졌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의녀 교육을 마치고 본래의 소속 지역으로 돌아간 의녀들은 지방에서 부인들을 대상으로 하는 진료에 참여하였다.

소속 관청 이외에 직능별로는 크게 침의녀(鍼醫女)와 맥의녀(脈醫女) 혹은 약의녀(藥醫女)로 구분되었다. 침의녀는 침을 놓는 의녀이며, 맥의녀는 진맥을 통해 약을 처방하는 데 필요한 정보를 제공함으로써 의약에 관여한 의녀였다. 특히 맥의녀의 경우에는 진찰과 함께 의약을 논의할 위치에 있었다는 점에서 전문 의료인으로서의 소양을 충분히 갖추었음을 알 수 있다.

변천

의녀는 전문 의료인으로서 활동하였지만 애초에 출신이 천인이었던 까닭에 창기(娼妓)로 인식되기도 하였다. 1485년에 천류 자녀의 종량법(從良法)을 정할 때에도 의녀는 창기와 같이 종량될 수 있도록 『경국대전』에 규정하였고, 성종 말에는 의녀를 공사(公私)의 연회에 참가하도록 하였다. 특히 연산군대에는 의녀들에게 의서 이외에 음악을 배우게 하여 내연(內宴)이 있을 때에는 기녀와 함께 공공연히 참가하도록 하였다. 이에 따라 중종 때에도 의녀를 의기(醫妓)라는 이름으로 조관들의 연회에 계속 초청하였다.

1510년(중종 5) 이후 의녀를 연희에 참가하지 못하도록 법률로써 여러 차례에 걸쳐 엄금하고 의료라는 본업에 돌아가도록 단속하였지만, 의기로서의 풍조는 계속되었다. 그럼에도 『속대전』의 규정 마련이나 영조대에 침의녀와 맥의녀를 강조한 데에서 보듯이 의료인으로서의 위치를 점차로 확대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천인이 갖는 한계는 여전하였다. 개항 이후 의료 제도가 변하고 노비 제도가 폐지되며 서양 의학에 의한 왕립병원(王立病院)에서 현대식 간호사가 근무하였지만 여성 의료인에 대한 부정적인 견해는 계속해서 유지되었다.

참고문헌

  • 『경국대전(經國大典)』
  • 『속대전(續大典)』
  • 김두종, 『한국 의학사』, 탐구당, 1993.
  • 김신근, 『한국 의약사』, 서울대학교 출판부, 2001.
  • 손홍렬, 『한국 중세의 의료 제도 연구』, 수서원, 1988.
  • 신동원, 『호열자, 조선을 습격하다: 몸과 의학의 한국사』, 역사비평사, 2004.
  • 이미숙, 「조선시대 의녀의 역할」, 『한국사상과 문화』 61, 2012.
  • 홍세영, 「조선시대 의녀의 정체성 고찰」, 『민족문화』 34, 2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