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패군(防牌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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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에서는 시위를 맡았으며, 주로 방패를 가지고 적의 공격을 막던 병종.

개설

방패군은 1415년(태종 15)에 대장(隊長)대부(隊副)를 모아 방패를 주어 특별히 조직한 군대였다. 대개 일반 양인 가운데에서 시취(試取)를 거쳐 충당되었다. 시취는 과거를 통하지 않고 인재를 등용하는 일종의 특별 채용 시험이었다. 1458년(세조 4)에는 방패를 임명할 때에도 대상자의 문벌이나 이력, 인품 등을 감안하도록 하였다.

담당 직무

방패는 일반 양민 가운데서 선발하여 군사적인 기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고 노역 따위에 동원되었던 것을 1415년 제도화하여 중앙에서 시위(侍衛)를 맡아보게 했던 군대의 한 종류였다. 방패는 진(陣)의 바깥에 늘어섰다. 방패는 상당히 중요한 병종으로 평가되었는데, 봉록을 받았으며 교대기에는 잡역을 면제받는 등 좋은 대우를 받았다.

변천

방패군은 1415년(태종 15)에 만들어졌다. 당초 십위 각령의 위(衛) 20명과 정(正) 40명은 말단의 구성원으로 이들을 합쳐 육십이라고 지칭하였는데 주로 역사에 동원되는 예가 많았다. 갑사 병종이 확립될 때 부사정 이상만 포함되고 ‘위’의 개칭인 대장과 ‘정’의 개칭인 대부는 그에 속하지 못하면서 방패가 별개의 병종으로 간주되었던 것이다. 이들은 역사에 동원되는 일이 많아 원래의 군사적 기능을 발휘하지 못했다. 때문에 이들 대상자에게 사역을 금하고 ‘건장한 자 1,000명을 뽑아 방패라는 무기를 주어 교대로 호위하게 하면 좋은 제도가 될 것이다’라는 견해를 받아들여 방패라는 병종을 만든 것이다. 물론 방패로 무장한 군사는 전에도 있었지만 하나의 독립된 병종이 된 것은 1415년의 일이다.

1455년(세조 1) 방패군에 소속된 지 20년이 되고 나이가 만 60세가 된 자는 본인의 의사에 따라 산관직(散官職)을 제수하도록 했다(『세조실록』 1년 10월 17일). 산관직은 실질적인 직무는 없으나 봉록은 부여하는 관직이었으므로, 방패군에 대한 상당한 예우를 한 것이다. 1457년 방패를 중앙군 오위(五衛)의 우위(右衛)에 분속했다. 그리고 갑사(甲士)와 섭육십(攝六十)과 방패근장(防牌近仗)이 1년마다 사고가 없으면 30일, 사고가 있으면 50일로써 기한을 정해 교대하여 번을 서고, 급료를 받도록 하다가 다시 4개월마다 교체하도록 했는데, 이때에 이르러 무사고 시 15일, 사고가 있으면 40일, 전함(前銜)의 군사는 무사고 20일, 사고가 있으면 50일로써 기한을 정하고, 그 기한 안에 나타나 상직(上直)에 근무하지 않는 사람은 산관(散官)을 만들어 충군하도록 했다. 또한 이미 혁파한 총통위에서 방패에 속하고자 하는 자가 있으면 정원에 따라 시행하게 했다. 1458년에는 방패에 충군하는 사람에 대한 검증을 보다 강화하여 이전에는 근무 경력 등만을 보던 것을 인품이며 집안 내력 등까지도 살피도록 하였다(『세조실록』 4년 윤2월 24일). 1462년에 번마다 9백 명, 5번(番) 6개월 교대 번상(番上)하도록 했던 방패를 사고 때문에 번마다 4, 5백 명을 넘지 못한다 하여 3개월 교대 번상하도록 했다. 또한 방패·총통군도 모조리 ‘진군(鎭軍)’이라 일컫도록 했다(『세조실록』 8년 7월 11일).

참고문헌

  • 민현구, 『조선초기의 군사제도와 정치』, 한국연구원, 19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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