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친위사(別親衛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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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6년(순조 16) 장중위를 대신하여 평안도 감영에 설치한 친위 군병.

개설

평안도 감영에는 변란에 대비하기 위해 장중위(壯中衛) 3초(哨)가 설치되어 있었는데, 초는 약 120명을 단위로 하는 군대 편제다. 하지만 한 달에 쌀 3말인 군병의 급료를 주거나 각종 시험에서 상으로 줄 밑천도 매우 적었으며, 1초는 정규 군인인 원군(元軍)의 보충을 위해서 등록된 대기병, 즉 대년군(待年軍)이라는 명목으로 급료를 주지 않았다. 때문에 장중위 군병을 선발할 때 백성들은 온갖 방법을 동원하여 기피하려 하였다. 이에 1816년(순조 16) 장중위를 혁파하고 호위경청(扈衛京廳)의 급료를 주기 위해 실시하는 무예 시험인 요사(料射)하는 법을 활용하여 별친기위를 표방하며 별친위사를 창설하였다. 그리고 1821년 360명을 원총(元摠)으로 하되 3초로 나누어 별장(別將) 1명과 위장(衛將) 3명을 두도록 하였다. 1867년(고종 4) 별친위사는 100명에 불과할 정도로 축소되었고, 1895년 을미개혁 때 지방군이 혁파되면서 함께 폐지되었다.

담당 직무

1816년 장중위를 대신하여 설치된 별친위사는, 평안도 감영의 친위로서 변란을 대비하거나 진압하는 역할을 담당하였다(『순조실록』16년 11월 3일). 별친위사는 매달 활쏘기 시험을 하여 등급에 따라 급료를 다르게 주었으며, 급료를 받은 군병은 돌아가면서 평양감영에서 번(番)을 서게 하였다. 아울러 장중위의 무사를 선발하기 위하여 실시한 특별 시험인 도시(都試)도 별친위사에게까지 시행하여 과거 시험의 최종 시험인 전시(殿試)에 곧바로 응시할 수 있는 자격, 곧 직부전시(直赴殿試) 등의 혜택을 주었다. 이로써 별친위사가 무예를 열심히 익히도록 권장하여 평안감영의 호위도 강화하려 하였다.

변천

1816년 창설 당시 별친위사는 별장과 위장이 각각 2명이었고, 도시의 합격자 수가 정해지지 않았으며, 매달 활쏘기 시험 때 급료를 받는 장교와 그렇지 않은 무리가 혼합되어 참여하였다. 그러다가 1821년 평안감사심상규의 지적에 따라 별친위사는 360명을 원총으로 하되 3초로 나누어 별장 1명과 위장 3명을 두었으며, 도시는 병자년에 변통한 규칙을 따르도록 하였다. 하지만 병인양요가 발생한 다음해인 1867년(고종 4) 평안감사박규수가 변란이 발생했을 때 감영에서 믿을 만한 군대는 100명에 불과한 별친위라며, 감영에 포수 200명을 더 설치하자고 주장한 것을 통해 별친위사가 크게 축소되었음을 알 수 있다[『고종실록』2월 20일 4번째기사]. 한편 별친위사는 1895년 을미개혁 때 지방군이 철폐되는 가운데 함께 폐지되었다.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
  • 『일성록(日省錄)』
  • 강석화, 「조선 후기 함경도의 친기위」, 『한국학보』89, 1997.
  • 강신엽, 「조선 후기 친기위」, 『경주사학』13, 199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