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동(歌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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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궁중의 연례(宴禮) 때 노래를 부르던 나이 어린 남자 악인(樂人).

개설

궁중 연례 때 노래를 부르던 나이 어린 남자아이로, 장악원 소속이다.

이들은 대개 서울의 각사에 소속된 노비나 양인에게 출가한 자의 소생으로, 15세 정도의 어린아이 중에서 택하여 음악을 익히고 재주를 갖춘 후 회례연과 같은 연회에서 정재를 추게 하거나 노래를 부르게 하였다. 또한 나이가 들면 다시 악공(樂工)으로 이속(移屬)시키고, 전의 근무 연한까지 함께 계산하여 거관(去官)하게 하였다. 후에 악공이 되어 연주와 노래를 담당하는 예는 순조·헌종·고종 때의 여러 가지 진찬의궤(進饌儀軌)와 진연의궤(進宴儀軌) 등에서 많이 발견된다.

가동의 수는 시기에 따라 가감이 있었으며, 성종 때 장악원에 소속된 가동의 수는 10명이었다. 이들은 모두 용모, 성음, 성품 등을 살펴 공노비 중에서 엄격하게 뽑혔다. 『악학궤범』 권2와 권9의 기록을 살펴보면, 행사 때 가동들은 초립(草笠)을 쓰기도 했고, 자줏빛 명주로 만든 두건을 쓰기도 했으며, 검은색 가죽신을 신고, 허리에 광다증대(廣多繒帶)를 띠었다.

변천

태종 때 하륜(河崙)이 동남(童男)과 남악(男樂)을 두자고 하였으나 시행되지 못하였고, 세종 때에 비로소 두게 되었다. 남악을 출연시키게 된 동기는 궁중에서 사신을 맞이할 때 여악(女樂)을 출연하게 하는 것은 예의가 아니라고 지적된 데에서 비롯된다.

특히 성종 때에는 가동이 정전(正殿)의 예연(禮宴)뿐만 아니라, 곡연에서 주악을 담당하였으며, 1485년(성종 16)에는 거둥[行幸] 중에 설치한 주정(晝停)에서도 연주와 노래를 담당하였다. 이후 1488년(성종 19)부터는 임금이 거둥할 때 어가를 따르기도 했으나, 재변이 있을 때는 중단되었다. 1492년(성종 23)에는 중국 사신 연향(宴饗) 때 주악을 담당하기도 하였으며, 주간뿐만 아니라, 야연(夜宴)에서도 가동들이 주악을 담당하였다.

선조 때에 이르러서는 궁중의 연향뿐만 아니라, 관직에 있는 사람의 사가(私家)에서 베푸는 연회에서도 무녀 등과 함께 주악을 담당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가동은 조선말기까지 계속되었다.

의의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문종 때 박연(朴堧)은 종묘향사(宗廟享祀)에 조종의 성덕을 노래하는 데 청아한 음성의 가동이 없을 수 없고, 이웃 나라 사신을 위한 연악에는 반드시 노래가 있고 춤이 있는데, 맑은 소리와 아름다운 자태를 위해서라도 어린 나이의 가동이 없을 수 없다고 가동이 필요한 이유를 역설하고 있다[『문종실록』 즉위년, 11월 22일 7번째기사]. 여기에서 가동의 배경과 존재의 의의를 살필 수 있다.

참고문헌

  • 『악학궤범(樂學軌範)』
  • 대한민국예술원 편집부, 『한국음악사전』, 대한민국예술원, 1985.
  • 김수경, 「고려말 악공·기녀의 위상과 음악사적 의의」, 『한국문화연구』 15, 이화여자대학교 한국문화연구원,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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