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붕(山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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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대잡극 연행 시에 진설(陳設)된 나무와 비단으로 장식한 임시 무대.

개설

조선시대에는 산대놀이를 공연하기 위해 대로변이나 산기슭에 임시로 무대를 설치하였다. 나무로 단을 쌓고 산봉우리 모양으로 높게 올린 뒤 오색 비단 장막을 쳐서 만들었는데, 산과 같이 높은 무대라는 의미에서 이를 ‘산붕(山棚)’ 혹은 ‘산대(山臺)’라고 하였다. 사신의 행차 때 산붕을 설치하고 각종 연회를 베풀었다.

연원 및 변천

일찍이 신라 진흥왕 때 팔관회를 개최하면서, 산붕과 같은 형태의 임시 무대인 채붕(綵棚)을 설치했다는 기록이 전한다. 고려시대 문헌 자료에서도 채붕이라는 용어를 찾아볼 수 있다. 『고려사』에서는 산대잡극의 연희자를 산대악인(山臺樂人) 혹은 산대색(山臺色)이라고 표현하였다. 조선시대에는 산붕·채붕·산대 등의 용어가 혼용되었다.

조선시대에는 사신의 행차 때 산붕을 설치하고 각종 연회를 베풀었다는 기록이 여러 곳에 등장한다. 일례로, 1401년(태종 1)에는 칙서를 받들고 오는 명나라 사신을 위해 산붕을 설치하고 결채(結綵)를 하고 나례(儺禮)와 백희(百戲)를 갖추었으며, 왕이 면복(冕服) 차림으로 군신을 거느리고 서교(西郊)에서 사신을 직접 맞이하였다고 한다(『태종실록』 1년 9월 1일).

그러나 조선시대 후기에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등의 전란으로 국가 재정이 어려워짐에 따라 산붕의 설치 또한 생략되는 경우가 많았다. 다만 『영조실록』에는 1736년(영조 12)에 누대(累代)에 걸쳐 성균관에 딸려 있는 반인(泮人)들을 동원해 중국 사신을 영접하는 행사를 펼치면서 시정에서 ‘설붕잡희(設棚雜戱)’의 공연 활동을 벌이기도 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영조실록』 12년 2월 22일), 여기서 설붕잡희는 산붕을 만들어 꼭두각시놀이와 가면극을 하는 것을 가리킨다. 이를 통해 조선시대 후기까지 산붕이 설치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생활·민속 관련 사항

산붕은 나무와 비단으로 장식한 가설무대로, 산붕이 설치되면 으레 국가의 큰 행사가 펼쳐졌다. 산붕의 설치에 동원된 인력은 대부분 군인이었으며, 가설무대에서 펼쳐지는 연희는 조선시대 공연 문화의 정수였다. 그러나 조선시대 후기로 접어들면서 경제적인 이유로 인해 산붕의 가설이 이루어지지 못함에 따라, 연희자들 또한 지방으로 흩어지게 되었다.

참고문헌

  • 이두현, 『한국연극사』, 학연사, 1985.
  • 전경욱, 『한국가면극 그 역사와 원리』, 열화당, 1998.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