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옥선(板屋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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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에 개발된 우리나라 최초의 본격 전투용 함선.

내용

판옥선은 임진왜란 중 크게 활약하였으며 뒤에 전선(戰船)으로 발전하였다. 이것은 조선의 대표적인 전투함으로 일명 판옥전선(板屋戰船)이라고도 한다. 조선전기의 군선(軍船)은 문헌상으로 대맹선(大猛船)·중맹선(中猛船)·소맹선(小猛船) 등 세 종류로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이 맹선들은 원래 세조 때 군용과 조세를 운반하는 조운(漕運)에 겸용할 수 있도록 규격을 통일한 일종의 병조선(兵漕船)이어서 몸집이 우둔하고 기동력도 부족해 일찍부터 군용으로는 쓸모가 없다는 논란이 많았다. 이러한 맹선이 삼포왜란(三浦倭亂)·사량왜변(蛇梁倭變)·을묘왜변 때에도 아무런 구실을 하지 못하여 새로운 전투함을 개발해야 한다는 기운이 팽배하였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1555년(명종 10) 아주 획기적이고 새로운 군함이 시험되었는데, 그것이 바로 판옥선이다.

판옥선은 주변국의 선형 변화에 대처하고 국제전에 대비하기 위해 명나라와 일본의 선형을 참조하여 개발한 군선이다. 이것은 이전 군함과는 근본적으로 성격을 달리한다. 맹선 등을 포함한 기존 군함의 경우 갑판 위에 여러 층의 누각을 쌓아 올린 경우는 종종 있지만, 기본적으로는 갑판이 하나밖에 없는 평선으로서 갑판 위에 사부·포수 등의 전투원과 노군과 선원 등의 비전투원이 한데 섞여 있었다. 그러다 보니 전투와 주행 모두 효율성이 떨어졌을 뿐만 아니라, 노군들의 안전 역시 보장받을 수 없었다. 반면 판옥선의 경우 기존의 갑판 주위에 판자로 된 두꺼운 방패를 빈틈없이 늘어세우고 그 위에 또 하나의 갑판을 설치했으니, 이름 그대로 갑판 위에 ‘판자로 집을 지은’ 것과 같았다. 이를 통하여 노군들은 2층 가판 아래의 보호된 공간에서 안전하게 노를 저을 수 있었고, 전투원들은 2층 갑판 위에서 노군의 방해를 받지 않고 전투에 임할 수 있었다. 또한 판옥선은 맹선에 비해 배의 높이가 높아졌는데, 이로 인하여 적병이 배 안으로 뛰어들기 힘들어졌을 뿐만 아니라 화약무기의 명중률과 사거리 역시 높아졌다.

이러한 장점을 지닌 판옥선은 을묘왜변 이후 점차 전국적으로 배치되어 맹선 체계를 대체했다. 임진왜란 기간 중에는 판옥선이 조선 수군의 명실상부한 주력 군함으로서 일본 수군에 대해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는 역할을 하고, 이후 군함의 대명사라 할 수 있는 전선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기까지 했다. 이와 같이 판옥선은 개발된 지 37년 만에 일어난 임진왜란 때 해전에서 적을 여지없이 무찌르는 맹활약을 하였다. 당시 우리 수군의 전투함은 몇 척의 거북선을 제외하면 오직 판옥선뿐이었고, 나머지는 정원이 불과 몇 명뿐인 전투함의 부속선으로 시중을 든다든가 정탐을 하는 등의 역할을 하는 극히 작은 사후선(伺候船)이나 협선(挾船)에 불과했다.

그러나 판옥선의 수는 임진왜란 전 기간을 통하여 매우 적었다. 왜란이 발발한 직후 전라좌수사이순신(李舜臣)이 처음으로 출동한 옥포해전(玉浦海戰)에 동원된 것이 겨우 28척으로 그중 4척은 경상우도의 것이었다. 2차 출동인 당포해전(唐浦海戰) 때에 전라좌도 23척, 전라우도 25척, 경상우도 3척을 합한 51척, 부산해전 때에 전라 좌·우도의 판옥선을 합하여 74척이었다. 1593년(선조 26) 8월 삼도의 판옥선이 겨우 100여 척에 이르고 각기 작은 배를 거느릴 수 있게 되었다는 기록이 있는데 가장 척수가 많이 확보된 때도 180여 척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임진왜란의 여러 해전에서 압승을 거두고 그 뒤에도 바다를 지킬 수 있었던 것은 판옥선이 매우 뛰어난 전투 능력을 보유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판옥선의 장점은 견후장대(堅厚長大)하다는 것인데, 임진왜란 때에 이미 125명 이상의 군사를 수용한 그 크기는 종전에 기껏 80명을 정원으로 한 대맹선이나 일본 군선에 비할 바가 아니었으며, 그 구조도 튼튼하였다. 일본 수군의 주력 군함인 안택선, 관선 등은 배의 바닥이 용골이라는 좁은 각지 하나만 깔고, 그것을 뼈대로 삼아 외판을 붙여나가는 첨저선이었던 반면, 판옥선은 바닥이 평평한 평저선의 전통을 이어받았다. 이것은 단점이자 곧 장점이 되었다. 우선 이물이 뾰족하지 못하기에 파도를 헤쳐나가는 능력이 부족했다. 또한 바닥이 평평하기에 첨저선에 비해 물에 닿는 면적은 큰 반면 흘수선은 낮았는데, 이는 배에 대한 물의 저항을 크게 했을 뿐만 아니라 배의 직진 능력에도 좋지 않은 영향을 주었다.

그러나 바닥이 평평하기에 갑작스레 썰물이 되어도 배가 좌초되어 전복될 위험이 없었고, 좌우 선회 능력이 뛰어나 조수간만의 차가 심하고 섬과 암초가 많은 우리나라 바다에서 사용하기에 적합했다. 특히 전투 시에 첨저선은 기동력에서 유리하지만 일단 선체 하부 구조가 좁기 때문에 상갑판에서 화포를 발사할 때 하중이나 반동을 흡수하기에 불리한 반면, 판옥선은 평저선으로 반동 흡수에 유리한 구조였다. 이러한 구조적인 우수성에 덧붙여 판옥선에는 이미 고려 말부터 200년에 걸쳐 발전해온 위력적인 함포가 장착되어 있어서 해상 함포를 활용한 전투능력이 떨어지는 일본은 해상전에서 조선군에 불리할 수밖에 없었다. 특히 조선은 군함에 탑재한 화기를 사용해 왜구를 토벌하는 것에 익숙했기에 이 시기에도 판옥선에서 천·지·현·황자총통 등의 대형 화포와 승자총통 등의 소형 화기를 적극적으로 운용했다. 따라서 해전이 벌어지면 조선군이 절대적인 우위를 점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판옥선은 소나무를 재료로 했기 때문에 일본의 삼나무나 전나무보다 단단했고, 판자 역시 더 두꺼웠으며, 쇠못이 아닌 나무못으로 목재를 결합했기에 수명도 길었다.

판옥선은 또한 그 높이가 높았고 거북선은 아예 위를 판자로 덮고 송곳 등을 꽂아두었기에, 조총을 일제 사격한 뒤 적선 위로 뛰어넘는 단병 전술을 장기로 하는 일본 수군으로서는 감당하기 힘들었다. 게다가 일본 군함은 탑승하고 있는 장수의 위세를 과시하기 위해 배 주위에 화려한 휘장이나 장막을 두르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것은 조선 수군이 화전 공격을 할 때 좋은 목표가 되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상장을 높게 2층으로 꾸며 놓은 판옥선의 장대한 선형은 노역을 전담하는 격군과 전투에 임하는 군사를 갈라놓아 서로 소임을 다하는 데 편리하도록 되어 있다. 뿐만 아니라 적이 선상에 기어올라 침입하지 못하도록 하고, 포를 높게 설치하여 유리한 자리에서 적에게 포격을 가할 수 있는 이점도 있다.

이러한 판옥선은 임진왜란 중에 개발된 거북선의 모형(母型)이 되었고 조선후기에도 주력함으로 남아 있었다. 거북선이 판옥선의 상장갑판 윗부분을 제거하고 그 자리에 둥그런 개판(蓋板)을 덮어 전사까지도 보호한 특수 군선이라는 점에서 조선후기의 전선은 판옥선이 그대로 이름만 바뀐 것임을 알 수 있다. 물론 임진왜란 이후 조선 수군은 거북선과 같은 특수 군함, 병선·방선과 같은 중형 군함, 사후선 등과 같은 소형 보조함도 보유하게 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선, 즉 판옥선은 구한말의 군제 개혁으로 구식 수군이 혁파될 때까지 주력 군함으로서 활약했던 것이다.

용례

大臣備邊司同議啓曰 各鎭浦板屋船 當初設立之時 厥數果多 其後漸次減省 而今則略除艋船 以板屋船 充大典艋船之數 且古昔賊倭之來 皆乘平船 故我國亦以平船制勝 今則賊倭 皆乘屋船 不得已用板屋船 然後可以相敵 今不可加減 但於大典所無各官板屋船, 則多用民力 而弊亦不貲 其中殘盛分揀 更加量減 今將減下各官船隻之數 書啓矣(『명종실록』 21년 3월 13일)

참고문헌

  • 국사편찬위원회, 『나라를 지켜낸 우리 무기와 무예』(한국문화사 14), 두산동아, 2007.
  • 김재근, 『조선왕조 군선연구』, 일조각, 1982.
  • 박재광, 『화염조선』, 글항아리,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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