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성(婁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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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방칠수(西方七宿) 중 제2수(宿)인 누수(婁宿)에 속한 별들.

개설

누성의 대표격인 누수 3성은 오늘날의 양자리에 해당하는 3개의 별로 구성되어 있으며, 황도 12궁 중 백양궁(白羊宮)에 속한다. 누수 3성의 제1성은 양자리 β별(2.7등성)이고, 제2성은 γ별(3.9등성)이며, 제3성은 α별(2.0등성)이다. 적도를 12개의 구역으로 나눈 12차(次)에 따르면 누수(婁宿)는 규수(奎宿), 위수(胃宿)와 함께 강루(降婁)에 속한다.

내용 및 특징

‘누(婁)’는 ‘누(屢)’와 같은 뜻으로, 무리를 모은다는 ‘취중(聚衆)’의 의미와 가축을 목양(牧養)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누성은 『사기(史記)』「천관서(天官書)」에서 ‘누수는 취중(聚衆)’이라고 한 이래, 병사를 진흥하고 무리를 모으는 일을 맡은 별로 인식되었다. 또 중국 제나라의 공양고(公羊高)는 『공양전(公羊傳)』에서, 말이 모이는 것을 ‘유(維)’라고 하고, 소가 모이는 것을 ‘누(婁)’라고 하였다. 그에 따라 목장[苑牧]에서 짐승을 길러 제천 의례인 교사(郊祀)에 희생으로 공급하는 일을 주관하는 별로 여겨지기도 하였다.

누수 3성은 규수(奎宿) 16성의 동쪽, 항수(亢宿)와 마주 보는 위치에 있는데, 백도와 황도의 교점 부근이어서, 누수 아래 9척 지점에 해와 달이 다니는 중도(中道)가 있다고 하였다.

『조선왕조실록』에 수록된 누성 관련 기사는 대부분 성변(星變) 관측과 관련되어 있다. 1398년(태조 7)의 기사를 살펴보면, ‘금성이 낮에 나타났고 밤에는 규성(奎星)에서 유성(流星)이 출현하였으며, 화성(火星)이 누성으로 들어갔다’는 기록(『태조실록』 7년 9월 1일)이 있다. 이것은 누성이 황도 위쪽 양자리에 위치하는데, 화성이 이곳을 지나고 있음을 말한 것이다.

그 밖에 ‘유성이 천진성(天津星)에서 나와 누수로 들어갔다’라든지(『성종실록』 14년 6월 22일), ‘초혼(初昏)에 간방(艮方)과 건방(乾方)에 불빛과 같은 운기가 있었고, 밤에 유성이 자미성(紫微星) 동원(東垣)에서 나와 누성 아래로 들어갔다’는 기록(『인조실록』 3년 8월 15일) 등도 모두 성변과 관련되어 있다.

한편, 1680년(숙종 6)에는 관상감에서 문신(文臣) 측후관(測候官)을 차출하여 윤번(輪番)으로 수직(守直)하면서 혜성을 관찰하도록 하였는데, 혜성이 우성(牛星)·두성(斗星)·삼성(參星)·허성(虛星)·위성(危星)·실성(室星)·벽성(壁星)·규성(奎星)·누성(婁星)·위성(胃星) 등에 출몰하여 2달 동안이나 나타났다 사라졌다 하였다. 당시는 숙종의 비인 인경왕후가 승하한 해인데, 국상(國喪)은 혜성이 나타나기 전에 났으므로 이 천변(天變)과는 무관하다고 여겼다. 그런데 그 후에 장희빈(張禧嬪)이 일개 폐희(嬖姬)로서 왕의 총애를 받고 왕비의 지위를 빼앗아 화란(禍亂)을 끼치고 큰 파란을 일으켰는데, 그녀가 총애를 받기 시작한 것이 바로 이 무렵이었으니, 이로써 하늘이 조짐을 보여주는 것이 우연이 아님을 알 수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숙종실록』 6년 11월 1일). 이것은 성변이 단순한 천문 현상이 아니라, 재이론(災異論)을 통해 나라의 길흉을 판단하는 근거가 되기도 하였음을 보여준다.

참고문헌

  • 『사기(史記)』
  • 『한서(漢書)』
  • 『여씨춘추(呂氏春秋)』
  • 『회남자(淮南子)』
  • 『삼국사기(三國史記)』
  • 『천문류초(天文類抄)』
  • 김일권, 『동양천문사상 하늘의 역사』, 예문서원, 2007.
  • 김일권, 『우리 역사의 하늘과 별자리』, 고즈윈, 20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