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식(土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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쌀을 다른 곡식으로 바꾸어 환곡을 징수할 때 사용하던 곡물 간 교환 비율.

개설

환곡을 징수할 때에는 흉년으로 인하여 쌀이 아닌 다른 곡식으로 징수하는 대봉(代捧)이 시행되는 경우가 있었다(『영조실록』 39년 9월 2일). 이때 곡물 간의 교환 비율은 『속대전』에 규정되어 있으며, 이를 호식(戶式)이라 불렀다. 호식에서는 전미(田米) 1석을 조·보리는 2석 7두 5승으로, 기장·귀보리·메밀은 3석 11두로 교환하도록 규정하였다. 함경도 북관에서는 호식 외에도 토식이 통용되었다. 토식에 따르면, 전미 1석을 조·보리는 2석으로, 기장·귀보리·메밀은 3석으로 교환하도록 하여 호식보다 잡곡의 가치를 높게 잡고 있었다. 곡물을 환산하는 방법이 2가지라 혼란이 야기되었기 때문에 여러 차례 개혁 논의가 진행되다가 1822년(순조 22)에 함경도 북관에서는 토식만을 사용하도록 결정되었다(『순조실록』 22년 12월 23일).

제정 경위 및 목적

환곡의 징수는 분급한 곡식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원칙이었으나, 흉년이 들었을 때에는 다른 곡식으로 받아들이거나 화폐로 징수하는 대봉(代捧)이 시행되었다. 이때 곡물 간의 교환 비율은 『속대전』에 호식이라는 명칭으로 규정되어 있었다. 19세기에 들어서 함경도 마천령산맥 북쪽의 북관(北關) 지역에서는 곡물을 다른 곡물로 교환할 때 호식과 토식을 사용하였다. 그러나 언제 토식이 만들어졌는지는 분명하지 않았다.

내용

1816년(순조 16) 함경도암행어사는 호식과 토식의 개혁을 요청하였다(『순조실록』 16년 6월 13일). 그에 따르면, 함경도는 잡곡을 쌀로 환산하는 방법이 토식과 호식 2가지가 있었다. 이 때문에 관에서 거두어들일 때 어떤 방식을 사용하느냐에 따라 곡물의 가격이 높아지거나 낮아져 폐단이 발생한다고 하였다. 이에 대하여 조정에서는 그 지방의 풍속에 따라 알맞게 잡곡을 쌀로 환산하는 방법을 제정해야 한다는 지시를 내렸다.

함경도 북관에서는 전미 1석을 조·보리는 2석 7두 5승으로, 기장·귀보리·메밀은 3석 11두로 교환하는 호식과 전미 1석을 조·보리는 2석으로, 기장·귀보리·메밀은 3석으로 교환하는 토식을 사용하고 있었다. 이처럼 2가지 규정이 있었으므로 잡곡을 쌀로 만든다거나 다른 곡식으로 전환할 때 혼란이 발생하였다. 이 과정에서 중간 착복이 발생하기도 하였다.

1820년(순조 20)에는 북관 지역에서 행정 경험을 한 관료가 이 문제의 개선을 중앙정부에 건의하였다(『순조실록』 20년 7월 23일). 우선, 북관의 폐단을 고치기 위하여 각 고을의 원환곡(元還穀)은 전미나 다른 잡곡 할 것 없이 다만 실지의 수량에 따라 본래의 곡식으로 보관해 두자고 하였다. 또한 다시 잡곡을 쌀로 만들거나 쌀을 잡곡으로 만들지 못하게 해야 한다고 하였다. 곡식을 나누어 주는 것과 받아들이는 것은 모두 호식을 사용하고, 관에서 쓰는 각종 물품도 모두 본색으로 받아들이자고 하였다. 또한 쓰고 남는 것이 있으면 시가에 따라 판매하여 곡물의 교환을 통한 부정을 방지하자고 하였다.

그러나 함경도 북관 지역에서 오랫동안 사용되어 왔던 토식이 오히려 정부의 공인을 받게 되었다. 1822년(순조 22) 함경도의 폐단을 논의하는 자리에서 북관의 각 고을은 모두 토식으로만 행하도록 결정되었다. 북관의 백성들은 호식은 모르고 토식에만 익숙해져 있어서, 만일 호식을 강제로 쓰게 한다면 아전이 농간을 부리기 쉬워 도리어 폐단이 많아질 거라는 염려에서였다. 대신 남관(南關)과 북관 사이에 곡물을 교환할 때에는 절미례(折米例)에 준하여 서로 바꾸지 말고 반드시 본색으로 주고받도록 하였다. 이로써 함경도 북관에서는 호식을 사용하지 않고 토식의 규정만을 사용하게 되었다.

변천

고종대에 들어서 토식을 사용하는 북관에서는 쌀 1석을 2냥으로 교환하고, 남관에서는 호식을 사용하여 3냥으로 교환하였다.

참고문헌

  • 양진석, 「18·19세기 환곡에 관한 연구」, 『한국사론』 21, 1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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