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지(南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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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나 건축물 등의 남쪽에 위치한 연못이나 풍수상 비보(裨補)를 위해 설치한 연못.

개설

남지(南池)는 방위상 도시나 특정 건축물의 남쪽에 위치한 연못을 말한다. 서울을 비롯해 여러 지역에 위치하였으며, 인공적 또는 자연적으로 조성된 경우도 있었다. 인공적으로 조성된 경우에는 화재 예방이나 제사의 대상으로 활용되었다.

위치 및 용도

조선시대 남지라는 이름의 연못은 전국에 산재하며, 주로 도시나 특정 건축물의 남쪽에 위치하였다. 남지는 지역에 따라 용도가 달랐다. 특히 서울의 남지는 숭례문 밖에 위치했는데, 이는 화재 방지에 그 목적이 있었다. 서울의 주산인 북악이 오행상 화산(火山)에 해당하여 조선은 건국 초기부터 중국 사신을 영접하던 모화관(慕華館)과 숭례문 밖에 연못을 조성해 화재의 위험을 막고자 하였다. 이밖에도 서울의 남지는 빼어난 경치로 인해 잔치가 자주 열리기도 하였고(『선조실록』 30년 2월 8일), 서울의 남지와 황해도 연안의 남지에서는 기우제 등의 제사를 지내기도 하였다(『성종실록』 3년 4월 26일) (『태종실록』 8년 1월 27일).

변천 및 현황

서울에는 남지 외에도 흥인문 밖에 동지(東池), 모화관 북쪽에 서지(西池) 등의 연못이 있었다. 서울의 남지는 1823년(순조 23)에 인근의 백성들이 말라붙은 못을 다시 파내고 물을 채웠다고 한다. 이 밖에도 성종의 능인 선릉(宣陵)과(『연산군일기』 2년 1월 11일) 황해도 연안, 경상도 함창 등지에 남지라는 명칭의 연못이 있었다. 한편 박지원이 안의현감일 때 관청 남쪽에 남지를 만들었다고도 한다.

형태

서울 숭례문 밖에 있었던 남지는 연꽃을 심어놓아 연지(蓮池)라고도 하였다.

관련사건 및 일화

서울 숭례문 밖의 남지에 대해서는 붕당 가운데 남인(南人)과 관련된 일화가 전한다.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에서는 민간에 전하는 이야기라 하면서, 원래 이 연못을 허목이 대각(臺閣)에 들어갈 때에 만들었으며, 1823년에 다시 이 못을 팠는데, 이 못을 파던 날에 채제공이 관직을 회복하였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이 연못이 남방(南方)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남인에게 응험이 있는 것이고 남인 가운데 문과 급제자가 넷이나 난 것도 우연한 일은 아니다 라고 하는 이야기를 기록하였다. 서울의 경우 남지가 숭례문 밖에 있었으며, 원래 김안로의 집터였다는 설이 전한다.

한편 연안의 남지는 연못에 신룡(神龍)이 있어서 매년 겨울에 얼음이 터지는 것을 용경(龍耕)이라고 하는데, 물 근원부터 하류에까지 곧게 터지면 그것은 홍수가 날 것을 점치는 것이라고 하였다(『태종실록』 8년 1월 27일).

참고문헌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
  • 『동국여지비고(東國輿地備攷)』
  • 『연암집(燕巖集)』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