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방흑룡기우제(北方黑龍祈雨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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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를 빌기 위해 북방의 흑룡에게 지내는 제사.

개설

오래도록 비가 내리지 않는 가뭄이 계속되면 농작물이 말라 죽게 되어 원만한 인간의 삶이 유지될 수 없게 된다. 이때 우주의 길흉화복을 관장한다고 믿는 존재들에게 비를 내려달라고 빌기 위해 제사를 지내는 행위가 기우제(祈雨祭)이다. 북방흑룡기우제는 조선시대 기우제의 하나로, 비를 주관한다고 알려진 북방의 흑룡에게 비를 내려달라고 지낸 제사이다.

연원 및 변천

기우제의 연혁은 자못 길다. 『삼국유사』「고조선」조에 의하면 환웅이 거느리고 왔다는 풍백(風伯)·우사(雨師)·운사(雲師)는 비바람과 구름을 주관하는 술사였다고 한다. 이들은 비를 비는 기우제를 지낼 수 있는 특별한 능력을 가진 이들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 풍백과 우사에 대한 신앙은 불교 의례에 영향을 미쳐 조선시대에 행해진 불교의 수륙재 의례에도 가장 먼저 풍백과 우사를 청해 모시는 권공(勸供) 의식을 설행한다.

수리 시설이 발달하지 못한 과거에 기우제는 국가 차원이나 민간 차원에서 다양하게 개최되었다. 가뭄은 자연 현상이지만 고대국가에서는 그 원인을 통치자의 부덕에서 찾기도 하였다. 따라서 가뭄이 들면, 정치적인 시혜와 통치자의 근신을 통해 민심을 위무하려고 하였다. 시혜로는 토목이나 건축 공사 따위에 백성을 동원하는 역사(役事)의 중지, 죄수 방면, 백성 구휼, 조세 감면 등의 조치가 있었다. 그리고 왕은 정전을 피해 정무를 보거나 음식을 줄이기도 하였다.

불교를 숭상한 고려시대 때는 밀교식 도량 등 다양한 기우제 양상이 나타나기 시작하였고, 조선시대에는 유교식 기고(祈告) 의례 양식의 기우제도 등장하였다. 기우제를 지낸 후에도 가뭄이 해소되지 않자 조선 태종 때는 도마뱀을 활용한 석척기우제(蜥蜴祈雨祭)도 개설되었다(『태종실록』 7년 6월 21일).

또 용신에게 비를 내려주기를 비는 기우제도 자주 개설되었는데, 용을 물을 주관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다섯 용에게 제사를 올리는 오룡제(五龍祭)는 대표적인 기우제 중에 하나였다. 오룡제는 서울 동대문 밖에 청룡(靑龍), 남대문 밖에 적룡(赤龍), 서대문 밖에 백룡(白龍), 종로 거리에 황룡(黃龍), 창의문 밖에 흑룡(黑龍)을 각각 그려 붙이고 사흘 동안 제사를 지내는 것인데, 이 중에서 마지막으로 북쪽 교외에 있었던 창의문 밖에서 지냈던 제사가 북방흑룡기우제이다.

이 기우제가 개설되기까지 조정에서는 기우에 대한 갖가지 대책을 전개했다. 1440년(세종 22) 4월 가뭄이 심하게 들어 밀보리가 결실을 맺지 못하고 파종 때를 놓칠 지경이 되자 조정에서는 가뭄 대책을 강구하였다. 우선 백성들에게는 금주령을 내리고, 살인죄 등 중범죄인 이외에 도형(徒刑) 이하의 형을 받은 죄수를 모두 풀어주었다(『세종실록』 22년 4월 18일). 이어 세종은 반찬의 가짓수를 줄이는 등의 조치를 취하며 근신하였다. 그래도 가뭄이 해소되지 않자 소격전에서 칠성에게 제사를 지내는 초례(醮禮)를 시작으로 도마뱀을 이용해 제사를 지내는 석척기우제, 무당을 모아 비가 내리도록 비는 취무(聚巫)기우제, 승려들을 모아 지내는 승도(僧徒)기우제를 행하였다(『세종실록』 22년 4월 25일). 이틀 뒤에는 풍운뇌우단과 삼각산·한강·목멱산에서 비를 빌었으며, 5월 4일에는 용을 그림으로 그리고 제사를 지내는 화룡기우제를 시작으로 오방오룡의 기우제가 시작되었다. 5일에는 동방청룡기우제, 8일에는 남방적룡기우제, 9일에는 중앙황룡기우제, 12일에는 서방백룡기우제, 15일에는 북방흑룡기우제를 지냈다(『세종실록』 22년 5월 15일). 오방의 오룡에게 3일간 10일에 걸쳐서 지냈는데, 남방적룡기우제만 1일간 지냈다. 1443년(세종 25)에도 가뭄으로 북방흑룡기우제가 설행되었다.

절차 및 내용

북방흑룡기우제는 용신신앙의 한 형태이다. 이 기우제의 절차와 내용은 조선시대 처음 시행됐던 석척기우제나 「대운경기우단법(大雲經祈雨壇法)」에서 참고할 수 있다. 석척기우제 때는 석척, 즉 도마뱀을 잡아다 독 가운데 넣고 자리[席]을 베풀고 분향(焚香)하며, 남자 아이 20인을 시켜 푸른 옷을 입고 버들가지를 가지고 "석척아! 석척아! 구름을 일으키고 안개를 토하며 비를 주룩주룩 오게 하면 너를 놓아 보내겠다."(『태종실록』 7년 6월 21일)라고 하며 비를 빌었다. 오룡제 역시 이와 유사한 형태로 이루어졌을 것이다.

「대운경기우단법」에는 오룡제를 지낼 때 단의 설치와 의식 절차를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 있는데, 그에 의하면, "단의 북방에 한 몸에 머리가 아홉이며 아홉 자 정도의 용과 그 권속이 둘러싸고 있는 모습은 푸르고 검은 구름에 끼어 있는 듯이 그린다. 반신 이하는 뱀의 모습을 하고 꼬리는 못에 잠기고 반신 이상은 보살의 합장한 모습으로 못에서 솟아나온 듯하다. 단의 네 구석에는 맑은 물병을 설치하고, 음식과 과자 등은 청색으로 염색하고 은근하고 깨끗한 마음으로 나열해 공양한다. 향을 사르며 청색의 꽃을 흩는다. 도량은 다 청색으로 장식하고, 기우를 청하는 사람은 승려이거나 팔재계를 받은 이가 행해야 한다."라고 하였다.

절차를 간단하게 요약하면, 북방에 단을 차리고, 흑룡을 그려 모신 뒤 흑룡의 능력을 찬탄하며 제사의 자리에 오기를 청하고 제수를 올리며, 비를 내려줄 것을 빌었다고 볼 수 있다. 마지막으로 깨끗한 사람[淨人]이 제사를 행하라는 것은 재계 사상이므로 유불도에서 공통으로 요청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참고문헌

  • 『삼국유사(三國遺事)』
  • 『삼국사기(三國史記)』
  • 『고려사(高麗史)』
  • 『대정신수대장경(大正新修大藏經)』19
  • 「대운경기우단법(大雲經祈雨壇法)」
  • 김용조, 「조선전기의 국행기양불사연구」, 동국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