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호두(沈虎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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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도교적 술법의 하나로, 잠자는 용을 깨워 비를 내리게 하기 위해 호랑이의 머리를 강물에 빠뜨리며 행하던 기우 의례.

개설

이규경(李圭景)의 『오주연문장전산고』 만물편의 「호랑변증설(虎狼辨證說)」이나 「기우제룡변증설(祈雨祭龍辨證說)」에서 "호랑이 쓸개를 물에 던지면 물이 요동을 하고[虎膽投水善動], 용연(龍淵)에 호랑이 뼈를 던지면 용이 일어난다[龍淵投虎骨龍起]고 하는 말이 있는데, 기우에 침호두법(沈虎頭法)을 쓰는 것은 용이 꺼리기 때문"이라는 내용이 들어 있다.

한강 양진나루 위에 위치한 양진당(楊津堂, [楊津祠])은 조선시대 침호두(沈虎頭) 기우제를 지내던 곳으로 유명하였다. 비를 내리게 하기 위해 물의 신인 용신(龍神)이 산다는 한강에 호랑이의 머리를 넣는 것은 양으로 음을 달래어 기를 누르려는 음양엽승(陰陽厭勝)의 한 술법이다. 기우제 때 도사(道士)들에게 「용왕경(龍王經)」을 읽게 한 것이나 양진당이 위치한 용당산(龍堂山)이란 산 이름도 이와 같은 양진당 기우제의 내력을 전하고 있다.

양진당은 광나루 위 용당산 기슭에 있었고, 그 북쪽에는 범굴사(梵窟寺)가 있었다. 범굴사는 세종의 여덟째 아들인 영응대군(永膺大君)이염(李琰)의 원당(願堂)으로 지정된 절이다. 『조선왕조실록』 등 문헌에 호굴사(虎窟寺)라고도 나오는 것을 보면 범굴사의 ‘범’은 한자어가 아닌 우리말 ‘범’이고, 또한 침호두의 기우 의례와도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연원 및 변천

침호두가 음양을 이용한 엽승법이라는 사실은 『조선왕조실록』의 기사에도 나온다. 1416년(태종 16) 5월 14일 의정부와 육조, 대간에서 한재(旱災)를 구제하는 일곱 가지 방책 중 하나로 제시된 것이 침호두로, "명산대천으로서 구름과 비를 일으킬 수 있는 곳에 소재관(所在官)으로 하여금 정성껏 기도하게 할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1429년(세종 11) 7월 2일 예조에서 가뭄 극복책으로 음양엽승책을 쓸 것을 건의하였는데, 제향 때를 제외하고는 북을 치지 못하게 하며, 한강 양진에 침호두 하는 것을 들었다(『세종실록』 11년 7월 2일). 이에 1430년(세종 12) 5월 25일 왕이 예조에 "여러 도에 명하여 호랑이 머리를 용이 있는 곳에 잠그게 하라."고 전지한 것으로 미루어 이후 도별로 침호두 기우제가 행해졌음을 알 수 있다.

세종은 1431년(세종 13) 5월 16일에 승정원에 전지하기를, "지금도 중국에서는 기우할 때에 호랑이 머리를 용이 사는 못에 담그곤 하는데, 이것은 믿을 수 없는 일이긴 하지만 옛 글에도 있으니 담그는 것이 어떻겠는가." 하였다. 이를 통해 중국에서도 용연에 침호두하는 풍속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예제(禮制)가 갖추어지는 세종 이후로도 이러한 기우 방식에는 큰 변화가 없었던 듯하다. 그러나 조선후기에 이르러 제사 장소인 양진당이 퇴락한 채 관리가 되지 않았음을 고려하면 침호두를 통한 기우제 역시 거의 행해지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침호두 기우제를 지낸 경우도 그 제물로 구하기 힘든 호랑이 머리 대신 멧돼지 한 마리를 올리는 방식으로 변형되었다.

절차 및 내용

성현(成俔)의 『용재총화』에, "제단(祭壇)은 성 안의 사직(社稷)이 가장 중요하고 그 외에는 성 밖에 여러 군데가 있는데, 그중에 용단(龍壇)이 한강 위에 있어 가뭄이 들면 침호두를 하여 기우제를 지낸다."고 쓰여 있다. 용단의 위치는 양진나루 위로 보인다. 『대전통편』에서는 "기우를 위해 침호두를 한강 저자도(楮子島)에서 한다."고 기록하고 있다. 호두(虎頭)가 진짜 호랑이의 머리인지, 아니면 모형인지에 대한 의문은 있지만 여러 정황이나 기록으로 보아 모형이 아니라 실제 호랑이 머리임이 확실하다.

박상(朴祥) 의 『눌재선생속집』에 「양진명소침호두(楊津溟所沈虎頭)」라는 시가 있는데, 호랑이의 이마와 머리에 관한 묘사가 생생한 것이나 호랑이 머리를 함에 담아 9개 역을 거쳐 용당(龍堂)으로 전했다고 한 것을 보면 가짜 호랑이 머리를 대상으로 쓴 시가 아닌 것이 틀림없다. 또한 한강 양진나루 위의 양진당이 위치한 산이 용당산(龍堂山)인 점을 고려하면, 여기서의 용당은 곧 양진당이라고 할 수 있다.

1474년(성종 5) 윤6월 10일에 예조에서 각처의 기우 행사 요건을 갖추어 실행할 것을 청하였는데, "한강의 양진에는 침호두하게 하고, 또 도류(道流)로 하여금 「용왕경」을 읽게 하며, 박연(朴淵)에도 침호두할 것"이라 하여 침호두에 관해 언급하고 있다. 당시 침호두 행사에 도류들이 참석하여 「용왕경」을 읽었다는 것은 이 행사가 도교식으로 진행되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그러나 1595년(선조 28) 4월 27일 기사에 저자도에서 화룡제를 지내려는데 「용왕경」이 모두 산실(散失)되어 구할 수 없다고 한 것을 보면,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이러한 전통이 지속되지 못했던 것 같다.

1704년(숙종 30) 6월 26일에는 한재가 심해질수록 단계를 높여 행하는 기우제 절차를 다음과 같이 개정하였다.

① 삼각산·목멱산·한강에 3품관을 보낸다.

② 용산강과 저자도에 재신(宰臣)을 보낸다.

③ 풍운뇌우·산천·우사(雩祀)에 재신을 보낸다.

④ 북교(北郊)에는 재신을 보내고 사직에는 중신(重臣)을 보낸다.

⑤ 종묘에 중신을 보낸다.

⑥ 삼각산, 목멱산, 그리고 한강 침호두에 근시(近侍)를 보낸다.

⑦ 용산강과 저자도에 중신을 보낸다.

⑧ 풍운뇌우·산천·우사에 중신을 보낸다.

⑨ 북교에는 중신을 보내고 모화관(慕華館) 못가의 석척동자(蜥蜴童子)는 무신(武臣) 가선대부를 보내며, 여염에는 병류(屛柳)한다.

⑩ 사직에는 대신(大臣)을 보내고, 경회루 못가의 석척동자는 무신 가선대부를 보낸다.

⑪ 종묘에는 대신을 보내고 춘당대 못가의 석척동자는 무신 가선대부를 보내며, 남문을 닫고, 북문을 열며 저자[市]를 옮긴다.

⑫ 5방토룡제(五方土龍祭)를 지내고, 양진·덕진·오관산(五冠山)·감악(紺岳)·송악(松岳)·관악(冠岳)·박연(朴淵)·화적연(禾積淵)·도미진(渡迷津)·진암(辰巖)에는 분시(焚柴)하되, 모두 본도(本道)로 하여금 설행(設行)하게 한다.

생활·민속적 관련 사항

기우제의 아홉 번째 절차에서 "여염에는 병류한다"는 대목이 있는데, 이는 버드나무가지를 물병에 담아 거꾸로 세워 놓는 민간에서의 기우 비법을 연상시킨다.

침호두를 하는 기우제 장소로 저자도와 양진이 나오는데, 양진을 현재는 광진나루로 부르는 양진나루로 볼 경우 둘은 얼마 떨어져 있지 않아 같은 장소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충주 탄금대 아래의 양진명소(楊津溟所)로 본다면 둘은 서로 다른 곳이다. 나라에서 지내는 기우제 중 한강 침호두 장소를 충주라고 하기에는 거리가 멀고, 『동국여지승람』이나 『여지도서』에 충주의 탄금대에 관한 기사에서 양진명소에서 침호두로 기우하였다는 기사가 없는 점으로 미루어 양진은 저자도 부근의 양진나루로 볼 수 있다.

참고문헌

  • 『용재총화(慵齋叢話)』
  • 『눌재선생속집(訥齋先生續集)』
  •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
  •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 『여지도서(輿地圖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