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희(觀戲)

sillokwiki
Silman (토론 | 기여) 사용자의 2017년 12월 9일 (토) 22:37 판 (XML 가져오기)

(차이) ← 이전 판 | 최신판 (차이) | 다음 판 → (차이)
이동: 둘러보기, 검색



놀이나 유희 등을 구경하며 즐기는 일.

개설

관희(觀戱)의 대상은 격구와 같은 운동 시합, 연등과 같은 종교 행사, 교방(敎坊)정재(呈才), 그리고 일체의 잡희(雜戱) 등이다. 나례(儺禮)를 구경하는 것을 관나희(觀儺戱)라 하고, 줄여서 관나(觀儺)라고 한다. 구경거리가 될 만한 온갖 놀이나 유희는 백희(百戱)라고 한다.

관희의 주체는 그 대상과 성격에 따라 다양하다. 국가 의례의 하나로 치러지는 놀이 행사에 관희의 주체는 왕이다. 그러나 관희를 탐닉하는 왕에게는 신하의 비판이 따른다. 부녀의 관희는 대개 연등과 같은 불교 전통을 갖는 종교 행사이다. 부녀가 집 밖을 나가 혼잡한 상황에서 구경하게 된다고 하여 조선 건국 초부터 이에 대한 제재가 있었다. 사족의 관희도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씨름처럼 길거리에서 벌어지는 놀이를 상민과 섞여 구경하는 경우가 이에 해당한다. 비판의 표적이 된 관료의 관희로는 곡회관희(曲會觀戱)가 있다. 관희란 원래 친한 벗끼리 모이는 연회라는 뜻인데, 매양 밤이면 신하들이 모여 술 마시는 것을 일삼아서 이를 이르는 말이 되었다. 이때는 술판과 함께 보고 즐길 만한 볼거리가 있다[俱有設酌觀戲之事].

『조선왕조실록』에 가장 많은 기사가 나오고 또한 가장 많이 논의가 된 것은 중국 사신들의 관희다. 중국에서는 관희가 보편화되어 있고 수요층도 많았다. 사신들이 조선에 올 때면 으레 조선 고유의 연희를 볼 수 있다고 기대하여 무리한 요구가 자주 뒤따랐다. 관희는 그것에 대한 부정적인 기사가 늘어감에도 불구하고 조선 전 기간에 걸쳐 존재해 온 문화였다.

연원 및 변천

고려 때의 연희로 주유희(侏儒戱)가 있었다. 『증보문헌비고』「예고(禮考)」 탄일조(誕日條)에 1288년(고려 충렬왕 14)에 왕이 세자 생일에 군신을 위해 연희를 열었는데, 이때 상장군정인경(鄭仁卿) 등이 주유희를 하여 왕 또한 박수를 치고 일어나 춤추었다고 하였다. 정인경은 충청남도 서산의 서산 정씨 중시조이며, 주유(侏儒)란 옥경(玉磬)을 연주하는 난쟁이 악사(樂師)다.

격구 관희도 고려 때 왕성하였으며, 조선에 들어와서도 지속되었다. 1425년(세종 7)에 격구를 폐하자는 사간원의 청이 있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세종실록』 7년 11월 20일). 격구 관희에 대한 부정적인 의견이 나오게 된 것은 이것이 무예를 연습하는 원래의 뜻과는 달리 한갓 놀며 구경하는 실없는 유희의 도구가 되었기 때문이다.

초파일 연등 관희를 금하자는 건의도 잇따랐다. 1428년(세종 10) 좌사간김효정(金孝貞) 등이 초파일에 연등으로 복을 구하고 남녀들이 떼 지어 다니며 놀이를 구경하는 관희의 폐습을 금지하자는 건의를 하였으나 세종은 허락하지 않았다(『세종실록』 10년 3월 22일).) 1431년(세종 13)에도 대사헌(大司憲) 신개(申槩) 등이 부녀의 관희, 즉 놀이구경을 금할 것을 상소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고려의 폐풍(弊風)이 조선에 들어와서도 이어져 부도(婦道)를 근엄하게 하는 데 걸림돌이 되기 때문이라는 것이 이유였다(『세종실록』 13년 7월 21일).

1567년(명종 22)에 정언정탁(鄭琢)은 모든 교방의 정재와 일체의 잡희는 모두 마음을 음탕하게 하는 것으로, 사람들이 그것을 보면 저절로 게으른 마음이 생기게 되기 때문에 왕은 더욱 경계해야 한다는 취지로 관희를 자제할 것을 건의하였다(『명종실록』 22년 6월 14일).

1662년(현종 3)에 장령이정(李程) 등이 아뢰기를, “지난번에 문희연(聞喜宴)을 열어 창악(娼樂)을 행하는 일을 일절 금단하였는데 영안위 홍주원(洪柱元), 이조 판서윤강(尹絳), 봉산군(鳳山君)이형신(李炯信), 장악원 첨정 이성연(李聖淵), 호조 좌랑 강욱(姜頊)이 모두 술자리를 베풀고 연희를 관람한 일이 있었습니다. 성대하게 베풀고 간소하게 행한 차이가 있기는 합니다만 금령(禁令)을 위반한 것은 마찬가지이니 홍주원 등을 모두 파직시키소서.” 하니, 왕이 따랐다(『현종실록』 3년 4월 19일). 이때 비판의 표적이 된 관료들의 관희를 앞서 언급한 곡회관희라고 한다.

절차 및 내용

1782년(정조 6)에 동지정사황인점(黃仁點), 부사 홍수보(洪秀輔)가 중국 연경(燕京: 현 북경)에 있으면서 치계(馳啓)한 중국의 관희 풍속을 통해 조선 관희의 내용을 짐작할 수 있다.

“(정월) 13일에는 후원(後園)에 있는 희대(戱臺)에 들어가서 불놀이[火戱]를 관람하였습니다. 14일에는 어좌 앞으로 들어가 반열(班列)에 참여하여 희자(戱子) 놀이를 관람하였습니다. 파할 때에 임해서 호부상서화신(和珅)이 황지(皇旨)를 전하여 왔는데, 그 내용은 ‘계절이 상원(上元)이 되었으므로 놀이를 설행하고 등불을 켠다[設戱放燈]’라는 제목으로 즉각 칠언사운시(七言四韻詩)를 지어 올리라는 것이었습니다. 신 등이 각각 1수씩 지어 전주(轉奏)하였습니다. 15일에 또 연연(筵宴)을 설행하였으므로 신 등이 정대광명전 뜰로 들어가서 연회에 참석하였는데, 응제(應製)했다고 하여 특별히 단필(緞疋)을 상으로 내렸습니다. 그리고 신 등을 인도하여 계단 위로 올라가서 사은하게 하였습니다. 오후에 또 상원의 불놀이를 설행하였는데, 신 등은 어좌 앞에 입참(入參)하였으며, 지축(紙軸)과 필묵을 반사하였습니다.”(『정조실록』 6년 2월 24일). 위 기사에 나오는 희대는 무대를 갖춘 상설 공연장과 같은 고정 건물이어서 행사 때마다 임시로 대(臺)를 설치한 조선의 공연 관행과 비교된다.

참고문헌

  • 『고려사(高麗史)』
  •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 사진실, 『한국 연극사 연구』, 태학사, 1997.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