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마연(上馬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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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에 돌아갈 날짜가 정해졌을 때 외국 사신에게 전송의 의미로 베풀던 연회.

개설

상마연(上馬宴)은 『경국대전』이나『대전회통』에는 규정되어 있지 않고 1452년(단종 즉위년) 이후에야 실시된 사례가 보여서, 출발 당일 베풀던 전연(餞宴)을 보강한 연회로 보인다. 장소는 사신의 숙소였고, 전연과 합쳐서 시행하기도 하였다. 하마연(下馬宴)과 함께 사신에 대한 연회 중 성대하였다. 중국뿐 아니라 일본·야인의 사신에 대해서도 실시되었고, 중국이나 일본에 간 조선 사신에게도 베풀어졌다. 중국 사신에 대해서는 왕이 직접 베푸는 것이 원칙이었고, 일본과 야인 등 그 밖의 사절은 예조에서 담당하였다.

연원 및 변천

1452년에 왕이 태평관(太平館)에 가서 사신에게 물품을 전달하고 위로한 후 수양대군(首陽大君)이 상마연을 대행하였으나(『단종실록』 즉위년 8월 26일), 이후 주로 왕이 직접 연회를 베풀고 선물을 주었다. 나라의 의식 행사와 날짜가 겹치는 경우에는 일정과 의식을 조정하였다. 임진왜란으로 태평관이 파괴되자 남별궁(南別宮)으로 장소를 옮기고 상차림의 규모도 줄였다(『선조실록』 35년 1월 21일). 접대 대상이 청(淸)으로 바뀐 인조대 이후에는, 반청(反淸)의식이 팽배하고 청에서도 접대의식을 간소화할 것을 용인하여 점차 시행되지 않았다.

절차 및 내용

중국 사신들의 귀환 날짜가 정해지면 일단 더 머물러 줄 것을 청한 후 상마연을 거행하게 되었다(『연산군일기』 1년 6월 6일).

연회의 절차와 내용은 『통문관지』에 잘 정리되어 있었다. 예빈시(禮賓寺) 등 관련 관청에서 연회를 준비한 후, 왕이 도착하여 어실(御室)에서 대기하다가 연회 장소의 계단 아래에서 사신과 만나 올라가 마주보고 두 번 절하고 착석한다. 먼저 음악이 연주되는 속에서 다례(茶禮)를 하고 나면, 음식상과 꽃·휘건(揮巾)·염수(鹽水)·소선 등을 바치고 나서 춤이 등장한다. 다음으로 술을 올리기 시작하는데, 술은 제조(提調) 등이 사신과 왕에게 동시에 올리며, 서로 읍하고 마신다. 첫 잔을 마신 후 고기와 만두를 바치고, 두 잔을 마신 후 탕과 첫 번째 안주[初味]를 바친다. 술을 마시는 도중에 매 잔이 오를 때마다 음악과 춤이 계속 바뀌고 안주가 올라간다. 술이 8순배 돈 후 탕과 7미(味)까지 올리고 나면 완배례(完盃禮)로 9번째 잔을 돌리고 음악을 그친다. 왕과 사신이 서로 읍하고 잔치를 마친다.

실제 연회에서는 술이 5순배나 7순배로 끝나는 경우도 많았고, 사신과의 협의에 의해 절차가 간소화되기도 하였다. 관례적으로 잔치가 끝나고 나면 사신과 수행원들에게 예단(禮單) 명목으로 많은 물품과 전별금을 선사하였다.

참고문헌

  • 『통문관지(通文館志)』
  • 『춘관통고(春官通考)』
  • 『영접도감연향색의궤(迎接都監宴享色儀軌)』
  • 金尙寶·李盛雨, 「朝鮮王朝의 迎接都監 宴享色儀軌에 관한 分析的 硏究」, 『韓國食文化學會誌』 7-1, 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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