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잠제(先蠶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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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중국의 잠신(蠶神)인 황제(黃帝)의 비 서릉씨(西陵氏)에 바쳤던 제사.

개설

선잠제는 중사(中祀)의 하나로, 중국의 잠신 서릉씨에게 제사한 것이다. 서릉씨는 황제헌원씨(黃帝軒轅氏)의 비로 처음 잠업을 가르쳐 준 인물이라고 하는데 뒤에 신격화된 것이다.

선잠제는 대부분 왕비가 직접 행하지 않고 관원을 보내 섭사(攝祀)로 행했다. 본래 『통전(通典)』, 『송사(宋史)』 등의 문헌에는 황후가 선잠에 친제한 후에 친잠례를 거행하도록 되어 있다. 선잠단은 북교(北郊)에 있었는데 장소가 좁고 친잠례를 위한 채상단(採桑壇)을 이미 궁궐의 후원에 마련하였기 때문에 송 제도에 의거하여 관원을 보내어 선잠에 제사지내게 하였다(『성종실록』 7년 9월 25일).

선잠제는 비록 왕비가 직접 행하지는 않았지만 자주 거행되었던 듯 보이며 『조선왕조실록』 전체에서 41회의 선잠제 기록이 발견된다. 그 중 1458년(세조 4) 한 번의 예외를 빼면 모두 3월 중의 사일(巳日)에 거행되었다.

선잠제를 지내고 나서 친잠례를 행하기도 하였다. 친잠은 왕비가 직접 뽕잎을 따는 채상(採桑) 의식인데, 친잠례를 행한 장소는 대부분 궁궐 후원이었다.

그러나 선잠제는 선농제와 대비되는 의미의 의식이었다. 이는 제도 정비 과정에서부터 드러나고 있다(『태종실록』 1년 12월 21일). 농상(農桑)을 본업(本業)으로 강조하였던 조선왕조에서는 비록 선잠제가 왕비에 의해 친행된 적이 없고, 행사도 선농제에 비해 조용하게 이루어졌던 것이지만 그 상징적 의미는 작지 않았다.

연원 및 변천

선잠제는 중국에서 전래된 것으로, 고려시대에도 행했다고 전해진다. 조선왕조에 들어 최초로 선잠제가 거행되었던 것은 1400년(정종 2)이었다(『정종실록』 2년 3월 4일). 1401년(태종 1)에는 선잠제의 악장을 만들도록 해당 관서에 지시하였다. 1411년(태종 11)에는 선잠제에 쓰는 폐백의 규정을 마련하였는데, 1장 8척의 검은 비단을 쓰기로 결정하였다(『태종실록』 11년 8월 25일). 1413년(태종 13) 1월에는 희생(犧牲)의 종류를 돼지 한 종류에서 돼지·양 2종을 쓰도록 바꾸었고(『태종실록』 13년 1월 21일), 같은 해 4월에는 사전(祀典)의 등급을 결정하면서 선농과 선잠의 제사를 중사 등급으로 결정하였다. 이처럼 선잠제와 관련된 법식은 태종대에 많은 정비가 이루어졌다.

선잠단의 경우, 조선 태조 때 한양 천도와 함께 축조되었으나 단의 격식이 올바르게 되어 있지 않았다(『태종실록』 13년 6월 8일). 이에 선잠단을 개축하는 문제가 논의되었고(『세종실록』 12년 2월 19일), 같은 해 겨울에 선잠단을 개축하기에 이르렀다(『세종실록』 12년 12월 8일). 그러나 첨지중추원사(僉知中樞院事)박연(朴堧)이 중사와 소사의 제단 정비가 제대로 되어 있지 않다는 건의를 올렸다. 그 건의 내용을 보면 “선잠(先蠶)·산천(山川)의 두 단은 잡석(雜石)으로 지경을 이루었으므로 무너지는 것은 겨우 면할 것이오나, 그 나머지 여러 단은 모두가 흙 언덕이 될 뿐이옵니다.”라고 하여 선잠단은 돌로 그 테두리를 둘러 있어서 흙단으로만 수축된 다른 제단보다는 그럭저럭 형태를 유지할 수 있었음을 알 수 있지만, 또 “소·양·개·돼지가 마구 드나들어 더럽게 만들며, 아울러 좁고 막히고 또 많이 기울어지고 쓰러졌다.”고 하여 당시 선잠단의 보존 상태가 좋지 않았다는 사실도 알 수 있다(『세종실록』 20년 11월 13일).

1473년(성종 4) 선잠단 개축 논의가 다시 일어났다. 이때는 선잠단의 위치 이전까지 논의되어, 북교(北郊) 동소문(東小門) 밖 사한이(沙閑伊)에 있던 선잠단을 동교(東郊) 흥인문(興仁門) 밖 평촌(平村)의 우사단(雩祀壇)선농단(先農壇) 옆으로 옮기기로 하였다(『성종실록』 4년 10월 25일).

그런데 그 다음 해인 1474년(성종 5)에 예조(禮曹)에서 ‘선잠단이 북교에 위치하는 것이 옛 제도에 더욱 부합하므로 그대로 수축하는 것이 좋다.’고 건의하여, 선잠단은 이전하지 않게 되었다(『성종실록』 5년 3월 28일). 선잠단이 옮겨지지 않은 것은 1476년(성종 7)에 “선잠단은 북교에 있다.”고 한 것(『성종실록』 7년 9월 25일)과, 5년 후인 1481년(성종 12) 또 한 차례 “선잠단은 북교에 있다.”고 나오고 있는 것을 보아 분명히 알 수 있다(『성종실록』 12년 1월 18일). 북교의 선잠단은 거리도 멀었지만, 왕비가 예를 행하기에는 협소하여 선잠 친제는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다.

1477년(성종 8)에 폐비윤씨(廢妃尹氏)가 조선왕조 최초의 친잠례를 거행하였다. 이를 위해서 채상단을 창덕궁 후원에 쌓았다(『성종실록』 8년 3월 3일). 이때 친잠에 앞서 거행되는 선잠제는 관원을 보내서 섭행하게 하였다. 16년 후인 1493년(성종 24)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로 창덕궁 후원에 단을 쌓아 친잠을 행했으며 선잠제는 관원이 섭행한 것으로 생각된다(『성종실록』 24년 3월 21일).

1767년(영조 43) 친잠례 때 만든 친잠의궤에는 당시 상정(詳定)하였던 ‘중궁전이 선잠에 작헌(酌獻)하는 의식’이 실려 있으나, 친행할 경우를 가정하여 준비한 것일 뿐이며 실제로 행해진 의례는 아니었다. 왕비가 직접 선잠단에서 제사한 사례는 조선시대에 한 번도 없었다.

왕비가 선잠에 친제하지 못하는 상황이며, 친잠 이전에 선잠에게 제사하는 것은 당연히 관원이 대행해야 하는 일로 여겨졌다. 1767년 영조가 친잠을 준비하는 당시 승지(承旨)와 내의원(內醫院) 도제조(都提調) 한익모(韓翼謨)가 입시한 자리에서, “우리나라에는 이미 (선잠제를) 친향(親享)하는 예가 없으니, 그날 축시(丑時) 초(初) 1각(刻)에 선잠단에 예관(禮官)을 보내 선잠제를 먼저 행하고” 나서 친잠을 거행하도록 한다고 밝혔다(『영조실록』 43년 1월 18일).

절차 및 내용

선잠제의 절차는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향선잠의(享先蠶儀)에서 살펴볼 수 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제사를 지내기 전 재계하며, 제사를 위한 막차(幕次)와 찬만(饌幔), 등가(登歌)와 헌가(軒架)가 자리 잡을 단, 신좌(神座), 초헌관(初獻官)의 자리를 비롯한 참여자들의 자리를 설치하고 기물의 진설을 마친다.

선잠제가 시작되면 제사에 참여하는 인원이 동문으로 들어간다. 집례(執禮)가 의례를 인도하며 찬자(贊者)가 이를 받아 크게 외치면 이에 따라 선잠제가 거행된다. 먼저 집사자(執事者)들이 손을 씻고 잔을 씻는다. 초헌관이 나오고 초헌관을 비롯한 여러 참여자들이 네 번 절한다. 집사자가 신위 앞에 세 번 향을 올린다. 초헌관이 폐백을 드리는 절차를 하면 대축(大祝)이 폐백 광주리를 받아서 신위 앞에 올린다. 그 후 초헌례를 행하는데, 초헌관이 신위 앞으로 나아가 작(爵)을 신위 앞에 올린다. 초헌관이 제자리로 돌아간 다음 모두 네 번 절하면 초헌례가 끝난다. 아헌례와 종헌례도 같이 행한다. 그 뒤 음복(飮福)하고 제사 고기인 조(胙)를 받는 음복수조(飮福受胙)를 행한다. 제사에 참여한 모든 사람들이 네 번 절하고 변두(籩豆)를 치우는 절차를 행한다. 초헌관이 망료위(望燎位)로 가서 축판과 제물을 묻는 것을 보면, 찬자가 초헌관에게 “예필(禮畢)”이라고 말한다. 초헌관이 악차로 내려가고, 여러 집사들은 네 번 절한다. 전사관(典祀官)이 신위판을 보관하고 예찬(禮饌)을 거둔 다음 나온다.

참고문헌

  • 남미혜, 『조선시대 양잠업 연구』, 지식산업사, 2009.
  • 박소동, 『국역친경친잠의궤』, 민족문화추진회, 1999.
  • 이의명, 「15·16세기 양잠정책과 그 성과」, 『한국사론』24, 1991.
  • 한형주, 「조선초기 중사제례의 정비와 그 운영 - 민생과 관련된 치제를 중심으로」, 『진단학보』89,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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