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동대나의(季冬大儺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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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해의 나쁜 기운을 몰아내고 새해를 맞이하기 위해 음력 12월에 행하던 나례(儺禮) 의식.

개설

나례는 한 해의 나쁜 기운을 몰아내고 새해를 맞이하기 위해 올리는 의식을 말하며, 구나(驅儺) 또는 나희(儺戱)라고도 하였다. 조선시대에는 주로 벽사(辟邪)·축역(逐疫)을 위해 시행하였는데, 그 가운데 계동(季冬) 즉, 음력 12월에 행하는 나례가 가장 성대하였으므로 계동 나례를 계동대나의(季冬大儺儀)라고 불렀다. 그밖에 관람과 유흥을 목적으로 나례를 행하는 경우도 있었다.

연원 및 변천

연말에 구나, 즉 악귀를 쫓는 풍속은 고대 중국에서 비롯되었다. 『고려사(高麗史)』「예지(禮志)」에 따르면, 우리나라에서는 고려시대인 1040년(고려 정종 6)부터 시행된 것으로 보인다. 궁중에서는 대궐 안을 청소한 후 삿된 기운을 몰아내고 새해를 맞이하기 위해 나례 의식을 거행하였다.

조선시대 계동대나의는 섣달그믐날 초저녁부터 시작해 한밤중까지 계속되었다(『태종실록』 14년 12월 30일). 대궐 뜰을 비롯해 각종 전각(殿閣)의 마당에서 거행되었으며, 격봉(擊棒), 풍정(豊呈), 관화(觀火) 등의 의식도 나례 전후에 수반되었다.

한편, 정기적 나례 이외에 신년 조하(朝賀)를 받을 때, 국경에서 중국 황제의 조칙(詔勅)을 맞이할 때, 부묘의(祔廟儀)를 거행 후 환궁할 때 노상에서 시행되기도 하였다(『태종실록』 1년 4월 4일)(『세종실록』 31년 10월 1일)(『세조실록』 10년 1월 1일). 부묘의는 삼년상을 마친 뒤 왕과 왕비의 신주(神主)를 종묘에 모시는 의례이다. 계동대나의는 조선후기 영조대까지만 행해졌다.

절차 및 내용

『세종실록』 「오례」를 기준으로 계동대나의의 절차를 간략히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행사 전날에 서운관(書雲觀)에서 12세 이상 16세 이하의 진자(侲子) 48인을 선발, 2대(隊)로 나누고 매 대마다 6인을 한 줄로 만들어 가면을 쓰고 적건(赤巾)과 적의(赤衣)를 입고 채찍을 쥐게 한다. 공인(工人) 20인도 적건과 적의를 착용한다. 방상시(方相氏) 4인은 황금색 눈이 4개 달린 가면을 쓰고 곰 가죽으로 만든 현의(玄衣)와 주상(朱裳)을 입고 오른손에는 창, 왼손에는 방패를 쥔다. 창수(唱帥) 4인은 몽둥이를 쥐고 가면을 쓰고 적의를 입는다. 그밖에 참여자들도 복장과 기물을 확인한다. 봉상시(奉常寺)에서는 수탉과 술을 마련하고, 성(城)의 사문(四門)의 오른쪽에 예감(瘞坎)을 만든다. 예감은 축판(祝板), 희생(犧牲) 등을 묻을 수 있는 자그마한 구덩이를 가리킨다. 저녁이 되면 무기와 제복을 갖춘 진자, 방상시 등의 나자(儺者)가 광화문 안에 모여 대기한다.

행사 당일 새벽에 관상감(觀象監) 관원이 이들을 인도하여 근정문(勤政門) 밖에 나아가면, 승지(承旨)가 역질(疫疾) 쫓기를 명할 것을 왕에게 아뢴다. 나자는 북을 치고 함성을 지르며 내정(內庭)으로 들어가면, 방상시도 창을 쥐고 방패를 흔들며 소리를 지른다. 진자는 대략 ‘12신으로 하여금 악귀(惡鬼)와 흉귀(凶鬼)를 내쫓고, 네 몸뚱이를 불태우고, 너의 간(肝)을 끌어내고, 네 살을 갈가리 찢고, 네 간장(肝腸)을 뽑아낼 것인즉, 네가 빨리 물러가지 않으면 뒷사람의 양식이 될 것이다’라는 내용으로 반복하여 화답하였다.

노래 부르기가 종료되면 나자는 광화문으로 나와 4대(隊)로 나뉘어 각각 사문의 바깥까지 행진한다. 나자가 사문을 통과할 때 축사(祝史), 재랑(齋郞) 등의 제관(祭官)이 희생을 바치고 축문을 읽으며 제사를 지낸다. 축사는 제사가 종료되면 축문과 닭고기를 예감에 묻고 물러간다.

참고문헌

  •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
  • 『국조속오례의(國朝續五禮儀)』
  • 윤아영, 「조선전기 儺禮와 그에 수반된 악가무의 형태에 관한 연구」, 『온지논총』13, 2005.
  • 윤아영, 「조선후기 儺禮의 용도와 연행종목에 관한 연구」, 『온지논총』15,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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