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곶역(황해도 금교도)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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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소곶역 |
한글표제 | 소곶역 |
한자표제 | 所串驛 |
상위어 | 금교도(金郊道) |
관련어 | 기린도(麒麟道), 속역(屬驛), 역승(驛丞), 봉산군(鳳山郡) |
분야 | 경제/교통/육운 |
유형 | 집단·기구 |
지역 | 대한민국 |
시대 | 조선(朝鮮) |
집필자 | 이승민 |
폐지 시기 | 19세기 이전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소곶역(所串驛) |
조선시대 황해도의 도로망인 금교도에 속한 역으로, 오늘날의 황해북도 봉산군에 위치해 있었음.
개설
소곶역(所串驛)은 조선전기 세종대에는 기린도(麒麟道)에 속한 역이었다가, 그 뒤 세조 연간에 전국의 역제(驛制)를 41역도(驛道)-543속역(屬驛) 체제로 개편할 때 금교도(金郊道)를 구성하는 역이 되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세종실록』「지리지」황해도 황주목 봉산군 편에 따르면, 소곶역은 도공역(陶工驛)과 함께 봉산 지역에 설치되어 있었다. 세종대에 전국적인 역도-역로 조직을 갖추는 과정에서 기린역(麒麟驛)·달만역(達滿驛)·삼지역(三支驛) 등과 함께 기린도 역승(驛丞) 관할이 되었다.
조직 및 역할
영조 때 편찬된 『여지도서(輿地圖書)』 등에는 봉산 소곶역에 대한 언급이 보이지 않고, 그 외에도 관련 기록이 없어, 역마나 역민 등의 배속 상황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 수 없다.
변천
조선시대의 역제는 세종대의 개편을 거쳐 세조대에 41역도-543속역 체제로 재편되었다. 이후 『경국대전(經國大典)』에 역 체제가 수록됨으로써 확립되었는데, 그 과정에서 소곶역은 기린도에서 금교도 소속으로 바뀌었다. 그밖에는 소곶역의 변천 사항에 대해 자세히 알려져 있는 것이 없다. 『여지도서』에는 관련 기록이 없고, 『대동지지(大東地志)』에는 봉산 지역의 역으로 검수역(劒水驛)과 동선역(洞仙驛)만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소곶역은 19세기 이전에 폐지된 것으로 보인다. 1530년(중종 25)에 간행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과 일제강점기에 작성된 「조선총독부 중추원 역원 조사표」에는 모두 봉산군 동쪽 5리 지점에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참고문헌
- 『여지도서(輿地圖書)』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대동지지(大東地志)』
- 조병로, 『한국근세 역제사연구』, 국학자료원,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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