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황(梁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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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575년(선조 8)~1597년(선조 30) = 23세]. 조선 중기의 의병. 자는 학기(學器)이고, 호는 진우재(眞愚齋)이다. 사헌부(司憲府)집의(執義)에 추증되었다. 본관은 남원(南原)이며, 주거지는 함양(咸陽)이다. 아버지는 의금부(義禁府)도사(都事)를 지낸 양홍주(梁弘澍)이고, 어머니 연안 이씨(延安李氏)는 현감(縣監)을 지낸 이사민(李師民)의 딸이다. 할아버지는 이조 참판(參判)을 지낸 양희(梁喜)이고, 증조할아버지는 양응곤(梁應鵾)이다. 정인홍(鄭仁弘)의 처질(妻姪)이며, 성혼(成渾)의 문인이기도 하다.

선조 시대 활동

성혼의 제자로서 어린 시절부터 학문과 문장을 인정받아 큰 기대를 받았다.[『송자대전(宋子大全)』 권175 「학생양군묘갈명(學生梁君墓碣銘)」] 양황(梁榥)은 18세가 되던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자 아버지 양홍주와 함께 가재를 정리하여 식량과 화살 등을 마련한 후, 의주(義州)의 행재소(行在所)까지 가서 헌납하였고, 이 화살은 <평양성전투> 때 큰 도움이 되었다.[『숙종실록(肅宗實錄)』숙종 28년 7월 25일, 『송자대전』 권174 「의금부도사양공묘갈명(義禁府都事梁公墓碣銘)」]

명(明)나라 제독(提督)이여송(李如松)이 명의 대군(大軍)을 이끌고 압록강(鴨綠江)을 건넜을 때, 군민(軍民)과 사대부들이 나와서 환영을 하였다. 이때 여러 학사(學士)들이 운(韻)을 나누어 시를 읊었는데, 양황이 가장 먼저 시를 읊었으며, 이후 양황의 시는 많은 이들에게 회람되고 완상되었다. 이때부터 양황의 문장이 널리 알려지고 명성이 높아졌다. 전쟁이 종식된 후 파산(坡山)의 정사(精舍)로 돌아가 스승 밑에서 수학하다가 1597년(선조 30) 23세로 세상을 떠났다.[『송자대전』 권175 「학생 양군 묘갈명」]

성품과 일화

양황의 자질과 성품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스승인 성혼은 “양황은 재주와 기량이 범상치 않고 학문과 문장을 스스로 힘쓰는데, 그의 문장은 참으로 대범한 솜씨이다.”라고 평가하였다. 그리고 그가 지은 바를 윤근수(尹根壽)에게 보였더니, 윤근수 역시 “여유가 있고 광대하게 펼쳐져 만약 성취되면 장차 그와 동류가 되는 이 드물 것이다.”라고 하였다. [『송자대전』 권175 「학생 양군 묘갈명」]

묘소와 후손

양황의 묘소는 경기도 양주시 덕계리에 있다. 송시열(宋時烈)이 지은 묘갈명이 남아있다.[『송자대전』 권175 「학생 양군 묘갈명」]

부인은 광주 이씨(廣州李氏)로 이집(李集)의 후손인 부정(副正)이여량(李汝良)의 딸인데 자녀로는 아들 양경갑(梁熲甲)을 두었다.

참고문헌

  • 『숙종실록(肅宗實錄)』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송자대전(宋子大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