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李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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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407년(태종 7) ~1454년(단종 2) = 48세]. 조선 전기 세종~세조 때 활동한 왕자. 태종(太宗)이방원(李芳遠)의 서출 8남 13녀 중에서 제 3왕자. 봉작(封爵)은 온녕군(溫寧君)이다. 본관은 전주(全州)이고 주거지는 서울이다. 어머니 신신빈(辛信嬪)는 영월 신씨(寧越辛氏)신영귀(辛永貴)의 딸이다. 신신빈이 낳은 3남 7녀 중에서 둘째 아들인데, 함녕군(諴寧君)이인(李䄄)의 동복동생이고, 근녕군(謹寧君)이농(李禯)의 동복형이다. 부인 순천 박씨(順天朴氏)는 부정(副正)문목공(文穆公)박안명(朴安命)의 딸이다.

온녕군의 행적

1422년(세종 4) 5월 나이 16세 때 아버지 태종이 승하하자, 어머니 신녕궁주(信寧宮主)신씨(辛氏)는 세종에게 알리지 않고 머리를 깎고 여승이 되었다. 1425년(세종 7) 12월 종2품상 가정대부(嘉靖大夫)온녕군이 되었다. 1426년(세종 8) 9월 세종이 서교(西郊)에 거둥하여 매를 놓아 매사냥을 구경하였는데, 20세의 온녕군이 날아가는 꿩을 활로 겨누어 쏘아 맞히니, 세종이 기뻐하여 내구마(內廐馬) 1필을 하사하였다. 1430년(세종 12) 혜령군(惠寧君)이지(李祉)와 함께 종학(宗學)에서 공부하면서 서로 농담하고 장난치다가 적발되어 말썽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12월에 온녕군이 되었다. 1435년(세종 17) 어머니 신녕궁주의 상을 당하였다.

1452년(단종 즉위) 윤9월 여러 종친들과 사정전(思政殿)에서 인견하고 활 한 장을 하사 받았다. 그해 10월에 수양대군(首陽大君)이 명(明)나라에 고명 사은사(誥命謝恩使)로 가게 되자 양녕대군(讓寧大君), 진남군(鎭南君)이종생(李終生), 계양군(桂陽君)이증(李璔) 등과 함께 수양대군을 전별하였다. 이날 양녕대군은 “수양은 천명(天命)이 있는 사람”이라는 의미심장한 발언을 하였는데, 나중에 그의 동복 형제들이 세조의 후의를 입은 것을 보면 그도 형제들과 함께 세조가 <계유정난(癸酉靖難)>을 일으키는데, 도움이 되었거나 적어도 반대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1454년(단종 2) 5월 12일에는 세상을 떠났는데, 향년이 48세였다. 온녕군은 어려서 지혜와 총기를 겸비하여 남보다 뛰어났으므로 종실에서 영특하였다는 평을 받았다. 어려서부터 영특하여 지혜가 있고 현명하여 매사를 알아서 예의와 절도에 맞게 행하였다고 한다.

묘소와 사당

시호는 양혜(良惠)이다. 묘소는 서울시 성북구 미아동 3거리 서쪽 언덕에 있었으나, 도시 확장 관계로 1962년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태자동 산10-1번지로 이장했다. 사당은 충청남도 공주시 신풍면 행정리에 있었는데, 현재는 충청남도 홍성군 홍동면 신기리로 이전하여 파종회에서 관리하고 있다.

부인 순천 박씨는 박안명의 딸인데, 자녀가 없다. 임영대군(臨瀛大君)이구(李璆)의 둘째아들 귀성군(龜城君)이준(李浚)을 양자로 삼았다. 1470년(성종 1) 정인지(鄭麟趾) 등이 귀성군이준을 탄핵하여, 삭탈관직하여 귀양 보냈는데, 그는 배소에서 후사없이 죽었다. 다시 근녕군이농의 아들 우산정(牛山正) 이종(李踵)을 양자로 삼았다.

참고문헌

  • 『세종실록(世宗實錄)』
  • 『단종실록(端宗實錄)』
  • 『중종실록(中宗實錄)』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선원록(璿源錄)』
  • 『선원강요(璿源綱要)』
  • 『선원계보(璿源系譜)』
  • 『선원계보기략(璿源系譜紀略)』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청음집(淸陰集)』
  • 『소호당집(韶護堂集)』
  • 『고산집(孤山集)』
  • 『옥천집(玉川集)』
  • 『강좌집(江左集)』
  •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