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칙(梁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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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624년(인조 2)~1686년(숙종 12) = 63세]. 조선 중기 효종(孝宗)~숙종(肅宗) 때의 무신(武臣). 경상좌수사(慶尙左水使) 등을 지냈다. 자는 자의(子儀)이다. 본관은 남원(南原)이고, 거주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경상병사(慶尙兵使)를 지낸 양응함(梁應涵)이고, 어머니 칠원 윤씨(漆原尹氏)는 현령(縣令)윤은걸(尹殷傑)의 딸이다. 양성지(梁誠之)의 7대손이기도 하다.

효종~현종 시대 활동

1651년(효종 2) 28세의 나이로 식년시(式年試) 무과(武科)에 급제하였고, 이후 선전관(宣傳官)에 임명되었다.[『방목(榜目)』, 『약천집(藥泉集)』 권20 「경상좌수사양공묘갈명(慶尙左水使梁公墓碣銘)」 이하 「양칙묘갈명」] 1655년(효종 6) 도총도사(都摠都事)에 임명되었고, 1656년(효종 7) 고부군수(古阜郡守)가 되었다.[『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효종 6년 7월 16일, 효종 7년 1월 22일]

현종(顯宗) 대에 들어서는 도총경력(都摠經歷) 및 훈련도감(訓鍊都監)파총(把摠)을 역임하였다.[『승정원일기』현종 2년 2월 25일, 현종 6년 1월 8일] 그러다가 1665년(현종 6) 갑산부사(甲山府使)로 나갔는데, 이듬해인 1666년(현종 7) 양칙의 어머니가 노령이라는 이유로 체차되었다.[『현종실록(顯宗實錄)』현종 7년 12월 10일, 『승정원일기』현종 6년 12월 26일, 현종 7년 2월 11일] 이후 훈련부정(訓鍊副正)으로 있다가, 풍천부사(豊川府使)로 가 되었으나, 1670년(현종 11) 병을 이유로 파출되었다.[『승정원일기』현종 7년 2월 13일, 현종 7년 10월 14일] 그러자 앞서 노령의 모친 때문에 갑산부사에서 체차되었다는 전력과 함께 지방관원이 개인적 이유를 들어 악지(惡地)를 피한다는 비판을 받았다.[『승정원일기』현종 11년 4월 5일] 1672년(현종 13) 첨지(僉知)로 제수되었고, 곧이어 영흥부사(永興府使)가 되었다.[『승정원일기』현종 13년 9월 21일, 현종 13년 11월 9일]

숙종 시대 활동

1677년(숙종 3) 평산현감(平山縣監)으로 활동한 데 이어 1680년(숙종 6) 해미현감(海美縣監)으로 임명되었다.[『승정원일기』숙종 3년 4월 10일, 숙종 6년 4월 23일] 그런데 1681년(숙종 7) 평산부에서 1680년 이전에 환상(還上)을 허위로 기록 한 사실이 밝혀져 그는 의금부에서 조사를 받고 처벌되었다.[『승정원일기』숙종 7년 3월 29일] 1684년(숙종 10)에는 오위장(五衛將)에 임명되었고 곧 이어 경상좌수사가 되었다.[『승정원일기』숙종 10년 2월 27일, 숙종 10년 6월 17일] 그러나 1686년(숙종 12) 병으로 체직되었는데, 그해 4월 병이 깊어져 귀환 중 양산(梁山)에서 세상을 떠났다.[『승정원일기』숙종 12년 3월 17일]

양칙이 세상을 떠나자 좌의정남구만(南九萬)은 과거 자신이 함경도관찰사(咸鏡道觀察使)로 재직하던 때에 영흥부사였던 양칙의 청렴결백을 직접 보았다며 포증(褒贈)할 것을 주장하였다. 이에 숙종은 양칙에게 가선대부(嘉善大夫)병조 참판(參判)의금부(義禁府)동지사(同知事)로 추증하였고, 장례에 필요한 물품을 내려 호상(護喪)하게 하였다.[『숙종실록(肅宗實錄)』숙종 12년 윤4월 23일, 「양칙묘갈명」] 이어 1696년(숙종 22)에도 남구만이 그를 청백리(淸白吏)로 추천하여 그의 처자를 구휼하고 자손을 등용하도록 하였다.[『숙종실록』숙종 22년 2월 29일] 이때 3남 생원(生員)양익지(梁益祉)가 장릉참봉(莊陵參奉)에 제수되었다.[「양칙묘갈명」]

성품과 일화

양칙의 성품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그는 타고난 성질이 간소하고 아담하여 일체의 행동이 온화하기가 한결 같아 청빈한 유생(儒生)과 같았다. 집에 있어서는 효도하고 우애하며 부모의 상사에 집상(執喪)하는 데는 제도보다도 지나치고 그 분재(分財)를 당하여서는 스스로 관록(官祿)이 있다 하여 형제들에게 좋은 물건과 토지를 주고 스스로 그 보잘것없는 것만을 취하였다.[「양칙묘갈명」]

전해지는 일화로는 그가 북쪽 고을에 부임할 때에 외척인 판서(判書)조형(趙珩)이 그가 장복(章服)이 없음을 알고 붉고 검은 색으로 두 벌을 주었더니 종신토록 바꾸지 않고 있다가 죽어서 염습(殮襲)하였다. 또 그가 남쪽 고을로부터 벼슬을 버리고 먼저 돌아왔는데 봉고관(封庫官)이 쌀을 내어 포장하여 아중(衙中)에 보내어 노자에 예비하게 하니 부인 능성 구씨(綾城具氏)가 물리치고 이르기를, “부자(夫子)의 뜻을 어길까 두렵다.”라고 하였다.[「양칙묘갈명」]

묘소와 후손

양칙의 묘소는 경기도 양평에 있으며 남구만이 지은 묘갈명이 남아있다.[「양칙묘갈명」]

3명의 부인 사이에서 3남 1녀를 두었다. 첫 번째 부인은 양천 허씨(陽川許氏)로 학생(學生) 허집(許)의 딸이며, 1녀를 두었는데, 무과(武科) 출신 송원규(宋遠規)의 처이다. 두 번째 부인은 거창 신씨(居昌愼氏)로 학생(學生) 신눌(愼訥)의 딸이며, 2남을 두었는데, 1남 양익희(梁益禧)와 2남 양익기(梁益祺)이다. 세 번째 부인은 능성 구씨로 정랑(正郞)구인희(具仁熙)의 딸이며, 3남 양익지(梁益祉)를 두었다. 서자로 양익록(梁益祿)이 있다.

참고문헌

  • 『현종실록(顯宗實錄)』
  • 『현종개수실록(顯宗改修實錄)』
  • 『숙종실록(肅宗實錄)』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국조방목(國朝榜目)』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약천집(藥泉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