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덕궁(仁德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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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종이 상왕(上王)으로 물러난 뒤 거처하던 궁가(宮家).

개설

정종이 아우 태종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나서 살던 궁가이며 정종을 대신하여 상징하는 궁호(宮號)이기도 하다. 1401년(태종 1) 태상왕이었던 태조가 머물던 덕수궁과 함께 개경에 건설되었으나, 1405년(태종 5) 태종이 다시 환도하면서 한양성 서대문 안으로 옮겨졌다. 정종은 죽을 때까지 인덕궁에 머물러 살았다.

위치 및 용도

인덕궁의 위치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태종이 한양으로 환도한 이후 서대문 안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1418년(태종 18) 태종은 인덕궁에 들어갈 때 숭례문(崇禮門)을 지나 서전문(西箭門)으로 들어가고, 나올 때도 서전문으로 돌아 나와 숭례문을 통해 인정전(仁政殿)의 공역 장소로 가겠다고 하였다. 인덕궁으로 가는 길가에 요절한 넷째 아들 성녕대군(誠寧大君)의 집이 있어 보게 되면 슬퍼지기 때문이라고 하였다(『태종실록』 18년 8월 1일). 서전문은 뒤에 새로 문을 만든 후 돈의문(敦義門, 서대문)이라 하였다.

변천 및 현황

인덕궁은 1401년에 태상왕전(太上王殿)인 덕수궁과 함께 개경에 만들어진 상왕의 궁가이다. 인덕궁에는 사고(私庫)로 의성고(義成庫)와 덕천고(德泉庫)가 있어 이를 통하여 상왕전의 재정 운영을 도모하였다. 1402년(태종 2)에 나라에 가뭄이 들자, 수라를 감선(減膳)하고 공상(供上)을 정지하였다. 이에 태종이 보화고(保和庫)를 인덕궁에 붙여 공상하게 했다(『태종실록』 2년 7월 3일). 1405년 다시 수도를 한양으로 옮기자 인덕궁도 한양 근처로 옮겨갈 수밖에 없게 되었다.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되어 있는 인덕궁의 기사 대부분은 상왕으로 물러나 있는 정종을 태종이 찾아가 연회를 베풀어 주는 내용이다. 1419년(세종 1) 정종이 세상을 뜨자, 빈전(殯殿)을 차리고 1420년(세종 2) 혼전(魂殿)을 차렸다(『세종실록』 1년 9월 26일).

관련사건 및 일화

성의 서쪽에 새로이 서전문의 위치를 상지(相地)할 때, 안성군(安城君)이숙번(李叔蕃)의 집 앞에 옛길이 있어 그곳으로 하려 했다. 그러나 이숙번이 인덕궁 앞 소동(小洞)이 있으므로 길을 열고 문(門)을 세울 만하다고 하니 조정에서 그대로 따랐다. 이숙번의 권세를 꺼렸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