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태주(吳泰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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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668년(현종 9)~1716년(숙종 42) = 49세]. 조선 제18대 왕인 현종(顯宗)의 딸인 명안공주(明安公主)의 남편으로 부마(駙馬). 자는 도장(道長), 호는 취몽헌(醉夢軒)이며, 시호는 문효(文孝)이다. 본관은 해주(海州)이며, 거주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참판(參判)오두인(吳斗寅)이고, 어머니 상주 황씨(尙州黃氏)는 황연(黃埏)의 딸이다. 친할아버지는 이조 판서(判書)오상(吳翔)이며, 양할아버지는 오숙(吳䎘)이고, 증조할아버지는 종친부(宗親府)전적(典籍)오사겸(吳士謙)이다.

숙종 시대 활동

오태주(吳泰周)는 12세가 되던 1679년(숙종 5)에 현종과 명성왕후(明聖王后) 사이의 셋째 딸인 명안공주와 혼인이 결정되어 해창위(海昌尉)에 봉해지고 이듬해인 1680년(숙종 6) 2월 혼례식을 올렸다.[『숙종실록(肅宗實錄)』숙종 5년 10월 4일, 숙종 5년 12월 2일, 숙종 6년 2월 18일] 당시 명안공주와 오태주의 집 크기가 너무 커서 여러 차례 문제가 되기도 하였는데, 숙종(肅宗)의 동복 형제 가운데 명안공주만이 유일하게 살아있었으므로 숙종이 많이 아껴서 벌어진 일이었다.[『숙종실록』숙종 6년 7월 28일, 숙종 6년 8월 3일] 관작은 명덕대부(明德大夫)로부터 시작하여 광덕대부(光德大夫)에 가계(加階)되었으며, 오위도총부(五衛都摠府)도총관(都摠管), 조지서(造紙署)제조(提調)귀후서(歸厚署) 제조를 겸임하였다.[『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1689년(숙종 15) 숙종과 남인(南人) 측은 훗날 경종(景宗)이 되는 원자(元子)를 낳은 장희빈(張禧嬪)을 왕후로 책봉하고, 원자를 세자로 책봉하고자 하였다. 이에 숙종은 인현왕후(仁顯王后)를 폐출(廢黜)하기 위하여 인현왕후의 투기 및 원자 탄생에 대한 분노, 그 외의 여러 언사를 문제 삼았다.[『숙종실록』숙종 15년 4월 23일] 그러자 오태주의 아버지 오두인을 비롯하여 86명이 원자로 진호(進號)되었다는 것은 적후(嫡后)를 의미하기 때문에 원자는 인현왕후의 아들이라는 이유를 들어 그 폐출에 반대한다는 상소를 올렸다.[『숙종실록』숙종 15년 4월 25일] 이에 숙종은 인현왕후의 폐출을 주장한 자신이 무고(誣告)를 한 것이냐며 이들을 국문(鞠問)하도록 하고, 오두인의 아들인 오태주는 관작을 삭탈하도록 하였다.[『숙종실록』숙종 15년 4월 25일] 그러나 얼마 후 숙종은 다시 오태주에게 직첩을 환급하였는데, 이후 오태주는 더 이상 벼슬을 하지 않고 서예를 즐기며 살았다.[『숙종실록』숙종 15년 5월 12일, 『영조실록(英祖實錄)』영조 9년 3월 1일] 그러다가 1716년(숙종 42) 10월 9일 소갈병(消渴病)으로 인하여 사망하였으니, 향년 49세였다.[『숙종실록』숙종 42년 10월 9일]

오태주는 글씨를 잘 썼으며, 특히 예서(隸書)에 능하였는데, 1703년(숙종 29)에는 청(淸)나라 사신이 재상의 시와 고시(古詩)가 담긴 병풍을 원하자 고시를 서사(書寫)하기도 하였다.[『숙종실록』숙종 29년 6월 17일, 숙종 42년 10월 9일] 뿐만 아니라 왕실의 옥책(玉冊)과 신판(神板) 등도 많이 썼다. 시문에도 능하여 숙종의 많은 총애를 받았다. 전하는 묵적으로는 행서체로 쓴 간찰이 다소 있으며, 금석문(金石文)으로는 「오두인석비(吳斗寅石碑)」 등이 있다.

성품과 일화

오태주의 성품과 자질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해진다. 그는 어려서부터 지혜롭고 어른을 잘 공경하여 맛있는 음식을 보면 번번이 사양하였다. 4세에는 벽(壁)에 걸린 장자(障子 : 천에 글씨나 그림을 그려서 족자같이 만든 물건)를 보고 어필(御筆)임을 알고는 무릎을 꿇고 절하였다고 한다. 또한 사람됨이 영민하고 활달하였으며 소탈하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좋고 싫음에 있어서는 명백함을 드러내었으나 경계(境界)를 설정하여 사람을 대하지는 않았다. 안으로는 어질고 밖으로는 극진히 행동하여 은혜로운 뜻이 두루 미쳤으므로, 궁핍한 자가 모두들 의지하였다.[『국조인물고』]

처음 부마의 간택을 받고서 비단을 몸에 걸치려 하지 않았는데, 명성왕후가 이를 듣고 가상하게 여겨 그의 뜻대로 하게 하였다. 또 부인인 명안공주가 오태주 보다 먼저 세상을 떠나자, 시비(侍婢)를 모두 놓아 보내고 나이가 많아 의지할 데가 없는 이들만을 남겨 두어 공주의 제사를 받들게 하였다.[『국조인물고』] 이러한 것을 볼 때 오태주가 평소에 얼마나 검소하고 소박함을 숭상하였는지를 짐작해볼 수 있다. 이를 두고 당대에도 이미 성품이 본디 평온하고 조용하여 사치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고 평가하였다.[『숙종실록』숙종 42년 10월 9일] 부마라는 신분 때문에 베풂이 드러나지 않았고, 또 집의 어려움으로 인해 더욱 자취를 감추고 명성을 거둬들였다.

서책을 가까이하는 것에 힘썼으므로 박통(博通)함이 많았다.[『국조인물고』] 또 숙종이 직접 시문을 지어 자주 오태주에게 내렸는데, 응수함이 번번이 동발(銅鉢)에서 나는 소리와 같았다고 한다.[『숙종실록』숙종 40년 1월 1일, 숙종 40년 3월 9일, 숙종 40년 3월 11일, 숙종 42년 3월 29일, 『국조인물고』]

묘소와 후손

묘소는 경기도 안산시 사사동에 있으며 부인 명안공주와 합장하였다. 김창흡(金昌翕)의 묘갈명(墓碣銘)이 남아있다.

명안공주는 어려서부터 몸이 약했는데 23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으며, 오태주와의 사이에 자식은 없다.[『숙종실록』숙종 9년 12월 28일, 숙종 13년 5월 17일] 이후 오태주는 동생 오진주(吳晉周)의 아들 오원(吳瑗)을 후사로 삼았다.

참고문헌

  • 『현종개수실록(顯宗改修實錄)』
  • 『숙종실록(肅宗實錄)』
  • 『영조실록(英祖實錄)』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양곡집(陽谷集)』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김영운, 『한국서화인명사서(韓國書畵人名辭書)』, 예술춘추사, 195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