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례궁(明禮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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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전기 월산대군의 사저였던 곳에 임진왜란 이후 왕실 소용의 내탕(內帑)을 마련하고 관리하던 궁가(宮家).

개설

월산대군(月山大君)의 개인 저택인 연경궁(延慶宮)으로 의경세자(懿敬世子)의 사우(祠宇)의묘(懿廟)가 있던 곳이다. 월산대군의 사저는 임진왜란 시기 의주에서 환도한 선조의 행궁으로 이용되기도 하였다. 이후 왕실의 토지와 재산을 관리하는 내탕의 역할을 하는 명례궁이 설치되었다. 1897년(광무 1) 고종이 대한제국의 법궁인 경운궁을 건설하면서 명례궁은 그 규모가 축소되고 1907년(융희 1) 궁장토 정리의 과정에서 어의궁(於義宮), 수진궁(壽進宮) 등의 궁가와 함께 사라지게 된다.

위치 및 용도

현재 서울특별시 중구 정동에 위치한 덕수궁 지역 내에 위치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곳의 조선시대 행정 구역은 한성부 남서(南署) 명례방(明禮坊)이다. 명례궁은 임진왜란 이후 왕실 내탕 중 왕후 소용의 내탕을 마련하고 관리하던 궁가였다. 광해군대부터 고종 연간까지 꾸준히 그 기록이 『조선왕조실록』에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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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천 및 현황

명례궁이 위치했던 터는 1469년(예종 1) 남이의 역모사건에 연루되었던 조영달(趙穎達)의 집이 있던 곳이다. 조영달의 집을 몰수했다가 1470년(성종 1) 세종의 막내 왕자였던 영응대군(永膺大君)의 부인 송씨(宋氏)에게 하사해서 왕실 소유가 되었다(『성종실록』 1년 1월 30일). 1471년(성종 2) 송씨가 이 집을 다시 왕실에 바치자 연경궁이라 이름 하고 왕실의 별궁으로 삼았다(『성종실록』 2년 7월 24일).

1472년(성종 3)에는 의경세자의 사우인 의묘를 연경궁 후원에 세울 것을 계획하였다. 의경세자는 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죽자 이후 덕종(德宗)으로 추존된 세자이다. 제사를 맡은 의경세자의 장남인 월산대군은 이곳을 하사 받았고, 이후 왕자의 저택이면서 사묘가 있는 제사궁(祭祀宮)이 되었다(『성종실록』 3년 12월 2일). 이후 1475년(성종 6) 의묘의 위판(位版)을 경복궁 내 연은전(延恩殿)에 옮겨 모시면서 연경궁은 월산대군의 저택 역할만 하게 되었다.

1486년(성종 17)에는 잠시 옹주의 저택으로 하사되었다가, 1593년(선조 26) 10월 임진왜란으로 한양 내 모든 궁궐이 소실되자 이곳을 행궁으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정릉동(貞陵洞) 행궁으로 불리던 이곳은 1611년(광해군 3) 10월에 경운궁이라는 궁호를 받게 되면서 공식적으로 정치를 하는 궁궐이 되었다(『광해군일기』 3년 10월 11일). 그러나 광해군의 창덕궁 이어 이후 더 이상 사용되지 않았고, 인조반정 이후에는 행궁 대부분의 건물과 토지를 원래 소유자에게 돌려주어 더 이상 행궁의 기능을 하지 않았다.

이곳에 왕실 소용의 내탕을 마련하고 관리하는 명례궁이 설치된 것은 임진왜란 후로 보인다. 임진왜란 중 극심한 재정난 속에서 선조가 23인의 왕자와 옹주에게 어전(漁箭)·염분(鹽盆)·시지(柴地) 등을 임시로 변통해 나누어 주었고, 뒤에 이 선례에 따라 궁방전(宮房田)을 나누어 주었기 때문이다.

명례궁에 관한 기록이 『조선왕조실록』에 처음 등장하는 것은 1623년(광해군 15) 1월 11일의 기사다(『광해군일기』 15년 1월 11일). 이후 고종 연간까지 꾸준히 자전(慈殿, 인조 연간), 중전(中殿, 현종 연간), 대비전(大妃殿, 숙종 연간), 대왕대비전(大王大妃殿, 숙종 연간), 양자전(兩慈殿, 숙종 연간), 동궁(東宮, 영·정조 연간)들의 내탕 마련과 궁가에서 발생한 문제들에 관여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1897년 고종이 대한제국의 법궁으로 사용할 경운궁을 확대 영건하면서 기능이 축소되었고 1907년 통감부의 황실 재산 정리 과정에서 사라졌다.

참고문헌

  •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편찬부 편,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88~1995.
  • 조영준, 「조선후기 궁방의 실체」, 『정신문화연구』제31권 제3호,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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