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생전(長生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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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상(國喪)에 사용할 관곽인 재궁을 살아 있을 때 미리 마련하여 보관하는 곳.

개설

장생전은 1444년(세종 26)에 조성되었으며, 조선의 왕·왕후·왕세자·왕세자빈 등의 시신을 담을 관곽(棺槨)을 미리 마련해 두는 곳이다(『세종실록』 26년 7월 17일). 국상이 발생하면 적합한 크기의 관곽을 원활히 사용하기 위하여 조성되었다.

왕과 왕후의 관은 재궁(梓宮)라 하고 왕세자와 왕세자빈의 관은 재실(梓室)이라 부른다. 재궁과 재실을 조성하는 목재는 황장목(黃腸木)이다. 연륜이 오래된 소나무 중에서 질 좋은 목재의 바깥 부분을 버리고 중심의 결 좋은 부분만을 취하여 한 장의 판재로 사용하였다. 이와 같은 좋은 목재를 미리 구해 두었다가 왕위에 오르면 매년마다 옻칠을 하여 견고하게 가공해 두어 국상을 대비하였다.

재궁의 크기는 『오례의(五禮儀)』 관제(棺制)의 치수에 의거하여 여러 개를 만들어 두었다고 한다. 상황에 따라 규격이 조금씩 다르고 옻칠된 횟수에 차이가 있어 국상이 발생하면 재궁의 상세 정보를 담은 단자를 받아 적합한 것을 선별하여 사용하였다. 예컨대 중종의 국상에서 당시 중전이었던 문정왕후(文定王后)가 장생전의 재궁을 기록한 단자를 가려 결정하였다. 구자(九字)와 천자(天字)가 표기된 재궁 중에서 구자표가 된 것이 115번 옻칠을 한 것이라 하여 이를 선정하였다. 예조(禮曹) 참판(參判)이 재궁을 받들어 명정전(明政殿)에 안치하였다가 빈전이 마련된 통명전(通明殿)으로 보냈다. 장생전에 마련된 재궁에는 구(九)자 외에도 천(天)·지(地)·현(玄)·세(歲)·우(雨)·노(露)·등(騰)의 글자를 써서 구분한 것들이 있었다.

1725년(영조 1)에는 영조가 왕위에 오르자, 영조의 국상을 미리 대비하여 장생전에서 재궁을 새로 만들어 옻칠을 100번 하여 예비해 둘 것을 전교하였다(『영조실록』 1년 6월 3일). 이는 전례에 따른 것이라 하니 아마도 세종 이후 새로운 왕이 왕위를 계승하면 그의 국상을 예비하여 재궁을 새롭게 갖추어 두는 전통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왕위를 계승한 초기에 『오례의(五禮儀)』 관제에 따라 마련해 둔 재궁의 크기가 작아져 정작 국상이 발생하였을 때 미리 마련해 둔 재궁을 사용하지 못한 사례가 나타났다. 효종의 국상에서 처음 그 사례가 있었으며, 현종 및 경종의 재궁도 작아 판을 덧붙여 사용하게 되었다.

조선에는 관을 제작하여 관리하고 판매하는 귀후서(歸厚署)라는 예조(禮曹)에 소속된 관청이 있었다. 왕과 왕후, 세자와 세자빈 이외에는 장례에 모두 귀후서의 관곽을 사용하였다. 그러나 특별한 경우 장생전의 재궁을 하사하는 사례가 있었다. 여러 개의 재궁 중에 왕과 왕후의 국상에서 가려 사용하고 남은 것은 보관하여 두었다가 나라에 공을 세운 공신이나 왕의 후궁과 대군 등의 장례에 특별히 내려 보내 사용하게 하는 것이다. 조선전기에는 매우 특별한 경우로 한정하고 있어 연산군이나 중종의 폐비 신씨(愼氏), 선조의 후궁 공빈김씨(恭嬪金氏) 등에게 내려 준 사례들이 나타난다. 그러나 조선후기가 되면 점차 잦아져서 왕비의 부모나 대군 및 공주의 내외에게 내려 주는 사례가 일반화되고, 영의정(領議政)에게도 재궁을 내려 보냈다.

위치 및 용도

조선에 처음 장생전이 조성된 것은 1404년(태조 4)이었다(『태조실록』 4년 7월 13일). 장생전은 공신(功臣)들의 초상화를 봉안하기 위해 경복궁의 서쪽 장의동(藏義洞)에 세웠다. 이는 당나라 능연각(凌煙閣)의 제도가 기본이 되었다고 한다. 당나라 태종은 당시 공신이었던 무기(無忌) 외 24명을 능연각에 그렸다고 한다. 1411년(태종 11)에는 장생전을 고쳐 사훈각(思勳閣)이라 하였다. 공신의 초상화와 함께 태조의 어진을 모시려고 하였다. 그러나 여러 논란이 있는 과정에서 이 제도는 사라진 듯하며 1444년(세종 26) 장생전 터에 왕실에서 사용할 관곽을 보관하기 시작하였다.

변천 및 현황

1444년 장의동에 조성하였으나 1504년(연산군 10)에는 장생전이 금표(禁表) 안에 있다 하여 혜안전(惠安殿) 뒤쪽 마을에 옮겨지었다(『연산군일기』 10년 7월 18일). 「도성대지도(都城大地圖)」와 「수선전도(首善全圖)」에는 장생전의 위치가 확인되는데, 경복궁의 동쪽 관광방(觀光坊)에 위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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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사건 및 일화

1659년(현종 즉위)에 장생전에 보관해 둔 재궁의 크기가 작아 효종의 시신을 담을 수 없게 되는 사건이 생겼다(『현종실록』 즉위년 5월 6일). 소렴을 마친 시신의 길이와 너비를 모두 재 보니 약 2치 정도 부족하였다. 국상이 진행되는 상황에서 재궁의 크기가 맞지 않은 것은 처음 있는 일이며 매우 큰일이었다. 갑자기 질 좋은 황장목을 구해 긴급히 옻칠을 하더라도 미리 준비해 둔 것보다 견고함이 미치지 못할 것이며, 또 질 좋은 황장목으로 넓은 판재를 구하기는 매우 힘든 일이었다. 결국 황장목을 이어 붙여 사용하도록 하였다.

이러한 사건이 발생한 원인을 『조선왕조실록』에는 두 가지로 기록하고 있다. 『현종실록』에는 소렴에서 잘못하였다고 지적하였다. 소렴에 송시열(宋時烈)이 참여하였는데 소렴을 끝내고 시신을 끈으로 묶어야 하는 시점에서, 효자는 차마 자기 어버이가 이미 죽은 것으로 칠 수 없어서 끈을 매지 않는다며 소렴의 끝에 끈을 매는 것을 하지 말도록 주장하였다. 이에 송준길(宋浚吉)은 날씨가 무더우니 한두 개만 남겨 두고 끈을 묶도록 할 것을 주장하였다. 이러한 논쟁이 있는 와중에 결국 끈을 묶지 않았고 시신이 부패하여 부풀어 재궁에 맞지 않게 된 것이라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현종개수실록』에서는 효종이 보통 사람보다 체격이 컸는데, 재궁은 즉위 초부터 준비하여 둔 보통 크기의 것이라 문제가 생긴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면서 모함하는 사람들이 송시열에게 죄를 돌린 것이라고 기록하였다. 이러한 사건은 무엇이 원인이든 간에 왕실의 장례 절차에 큰 차질을 만들었다. 이날 이후 조선후기 장례 절차에는 ‘재궁가칠곡림의(梓宮加漆哭臨儀)’라 하여 빈전에서 재궁에 옻칠을 반복적으로 행하는 의례 절차가 생겨났다.

참고문헌

  • 「도성대지도(都城大地圖)」「수선전도(首善全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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