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문(獨立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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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 성립기에 대외적으로 자주독립을 나타내기 위해 고종의 하사금과 국민의 성금으로 건축한 문.

개설

1896년 6월 20일자 『독립신문』 영문판에 따르면, 고종의 승인을 받아 서대문 밖 중국 사신을 맞이하던 영은문 터에 독립문이 건설되었다. 일반적으로 독립문은 서재필이 영은문을 헐고 그 자리에 건설한 것으로 알려졌으나, 독립문 건설은 영은문의 철거와 직접적인 관련이 없다. 1896년 7월 2일 결성된 독립협회의 협회 규칙 제2조에 따르면, ‘독립협회에서는 독립문과 독립공원을 건설하는 사무를 관장’한다고 역할이 명확하게 명기되어 있다. 독립문은 독립협회 발기 위원이 510원, 왕실에서 왕태자 명의로 1,000원 등 총 3,825원의 예산으로 지어졌다. 독립협회는 서재필을 독립문 건립 책임자로 선정하고 1896년 9월 6일 서재필과 건설을 위한 계약을 체결하였다. 1896년 11월 21일에 기공식이 행해졌고, 1897년 11월 20일 완공되었다(『고종실록』 33년 11월 21일).

위치 및 용도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현저동 941번지에 위치하며, 사적 제32호로 지정되었다. 조선을 압박하는 세계열강으로부터 조선의 독립을 유지하겠다는 의지를 담고 있다.

변천 및 현황

일반적으로 독립문은 청나라로부터 독립을 천명하기 위해, 청에 대한 사대의 상징이었던 영은문을 철거하고 그 자리에 독립문을 건설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이는 사실과 다르다. 청의 사신을 맞이하던 영은문이 철거된 것은 1894년 갑오개혁으로 집권한 김홍집 내각에 의해서였다. 김홍집 내각은 1895년 2월 영은문을 철거하였으나 독립문을 세울 계획은 없었으며, 영은문 터는 철거된 채로 1년 4개월 동안 방치되었다. 서재필이 1896년 6월 20일자 영문 독립신문인 『인디펜던트(Independent)』에 기고한 글에서, 국왕이 영은문의 옛터에 독립문이라고 명명할 문을 건립할 것을 승인하였다는 내용을 전하고 있다. 이는 고종이 아관파천으로 러시아 공사관에 머물면서 독립문의 건설을 결정했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독립문이 영은문 철거의 연속선상에서 청에 대한 사대를 끊는 상징적 의미를 갖고 있다는 기존의 해석은 고쳐져야 한다.

서재필은 『독립신문』에 게재한 글에서 “오늘 우리는 국왕이 서대문 밖 영은문의 옛터에 독립문이라고 명명할 문을 건립할 것을 승인한 사실을 경축하는 바이다. 우리는 그 문의 이름이 국문으로 조각될지 알지 못하지만 그렇게 되기를 바란다. (중략) 이 문은 다만 중국으로부터 독립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일본으로부터, 러시아로부터, 그리고 모든 유럽 열강으로부터 독립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하고 독립문 건설의 의미를 명확히 전달하고 있다. 또한 “그것은 조선이 전쟁의 폭력으로 열강들에 대항해 승리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조선의 위치가 극히 중요해 평화와 휴머니티와 진보의 이익을 위해서 조선의 독립이 필요하며, 조선이 동양 열강 사이의 중요한 위치를 향유함을 보장하도록 위치하고 있다는 의미에서 그러한 것이다. 전쟁이 그의 주변에서 발발할 수 있을 것이다. 아니 그의 머리 위에서 쏟아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힘의 균형의 법칙에 의해 조선은 손상 받지 않고 다시 일어설 것이다. 독립문이여, 성공하라! 그리고 다음 세대로 하여금 잊지 않게 하라.” 하며 독립문 건설이 갖는 의미를 후세들이 명심할 것을 당부하고 있다.

위와 같은 서재필의 글은 독립문 건설에 관한 세간의 오해를 없앨 수 있는 중요한 내용을 담고 있다. 첫째, 독립문 건립이 서재필 박사와 독립협회 차원의 사업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둘째, ‘중국으로부터의 독립’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일본, 러시아 그리고 유럽의 모든 국가로부터의 독립’을 의미한다는 말은 독립문의 건립 목적이 세간에 알려진 것과 다르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는 당시 전 지구적으로 만연하던 식민지 쟁탈전의 마지막 땅인 아시아, 그중에서도 마지막으로 개항한 한반도에 대한 세계 각국의 압력을 향한 조선 정부의 공개적인 메시지였던 것이다(『고종실록』35년 2월 22일).

서재필이 언급한 ‘힘의 균형의 법칙’은 당시 조선 정부가 세계정세의 흐름을 정확하게 읽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우리에게 알려진 것과 달리 청에 대한 사대는 갑오개혁과 함께 이미 완료되었다. 독립문의 건설은 오래 지나지 않아 있을지도 모르는 일본을 비롯한 세계 각국에 대해 조선이 엄연히 독립국임을 선언하는 메시지를 담고 있었다.

신용하에 따르면 독립협회의 사업 목적은 독립문과 독립공원의 건설을 맡는 것이었고, 이는 독립협회 규칙 제2조에 규정되어 있었다. 이는 독립문 건설에 대한 고종의 승인 후, 이를 실천에 옮기기 위해 조직된 조직이 독립협회였음을 의미한다. 한편, 독립협회는 1896년 9월 총비용 3,825원으로 독립문 건설을 위한 계약을 서재필과 체결하였다. 이는 독립문 건설이 조선 정부가 직접 나설 수 없는 상황에서 독립협회를 통해 추진된 사업이며, 서재필은 독립문 건설을 위한 실무 책임자였음을 의미한다.

한편, 독립문 건설과 함께 독립관이 건설되었으며, 도성 밖에 최초의 서양식 공원이 건설되었다. 1979년에는 성산대로 건설 공사에 따라 현 위치로 옮겨졌다. 원래는 현재보다 남동쪽으로 70미터 떨어진 길 가운데에 위치했다.

형태

독립문은 파리의 개선문을 모델로 건설되었으며, 개선문 양식은 서구 유럽과 일본 도시의 근대적 상징으로 사용되던 당시 세계적 추세이기도 하였다. 화강석을 쌓아 만들었는데, 벽체 내부에는 콘크리트가 사용되었다. 중앙에 1개의 홍예문이 있고, 왼편에는 정상으로 통하는 돌계단이 있다. 조선은 전통적으로 성문을 만들 때 문의 전면과 후면에만 아치를 사용하고 중간에는 개판(蓋板)을 설치하였다. 그러나 독립문은 이와 달리 전면과 후면 사이에도 붉은 벽돌에 의한 아치가 연속된 원통형 아치[Barreled vault]를 사용하였다. 독립문에는 서재필의 바람과 달리 ‘독립문’이 한글이 아닌 한자로 새겨졌는데, 이 글자는 아이러니하게도 훗날 매국노의 상징인 이완용이 썼다고 한다.

관련사건 및 일화

독립문과 함께 건설된 독립관의 편액은 당시 왕세자인 순종의 친필로 알려졌다. 독립문에는 전통 건축과 달리 편액이 걸리지 않고, 독립문 상부에 글이 새겨졌다. 독립문의 앞과 뒤에는 한글과 한자로 각각 ‘독립문’과 ‘獨立門’이 새겨져 있다. 1924년 7월 15일 『동아일보』의 ‘내동리 명물’ 연재에 독립문에 관한 기사가 실렸다. 이 기사에 따르면 독립문의 국문과 한문은 친일파로 매국노의 상징인 이완용의 글이라고 한다. 독립문 건설 당시 이완용은 독립협회 발기인이었으며, 당대 제일의 명필이라는 평을 받았다.

참고문헌

  • 안창모, 『덕수궁: 시대의 운명을 안고 제국의 중심에 서다』, 동녘, 2009.
  • 신용하, 「서재필의 독립협회 운동과 사상」, 『한국 근대 지성사 연구』, 서울대학교출판부, 2005.
  • 『독립신문』1896년 6월 20일.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