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경묘(懿敬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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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종으로 추존된 의경세자(懿敬世子)를 제사 지내기 위한 사묘(祀廟).

개설

의경세자는 세조의 장자로, 세자위에 있다 요절한 인물이다. 처음에는 효정묘(孝靖廟)라 칭하다가(『세조실록』 5년 9월 26일) 1471년(성종 2)에 의묘(懿廟)로 이름을 바꾸고 사시대향(四時大享)을 지냈다(『성종실록』 2년 12월 22일). 1475년(성종 6) 의경세자를 회간대왕(懷簡大王)으로 추존하고 경복궁 내 별전인 연은전(延恩殿)으로 위패를 옮겼다(『성종실록』 6년 2월 26일). 이후 의묘는 회간대왕의 영정(影幀)·시고(諡誥)·고명(誥命)을 안치하는 곳이 되었다.

위치 및 용도

의경묘는 현재 서울특별시 중구 정동에 위치한 덕수궁 지역 내에 위치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곳의 조선시대 행정 구역은 한성부 남서(南署) 명례방(明禮坊)이다. 명례궁 자리는 이전에 연경궁(延慶宮)이었는데, 명례궁은 그중에서도 연경궁의 후원에 있었다. 의경세자가 덕종으로 추존되어 그의 위패가 연은전으로 옮겨가기 전까지 제사를 지내는 곳으로 사용되었다.

변천 및 현황

의경묘는 세조의 장남으로 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요절한 의경세자의 묘호(廟號)다. 1459년(세조 5)에는 사우(祠宇)는 효정묘(孝靖廟), 무덤은 의묘(懿墓)라고 하였다. 예종 사후에 의경세자의 둘째 아들인 자을산군(者乙山君)이 왕위에 오르면서 1472년(성종 3) 사우를 왕실의 별궁인 연경궁 후원에 세웠다. 제사를 의경세자의 장남인 월산대군(月山大君)이 맡게 되면서 연경궁도 월산대군에게 하사되었다. 즉 연경궁은 왕자의 제택이면서 사묘가 있는 제사궁(祭祀宮)이 된 것이다.

1475년 2월 3일, 의경세자를 회간대왕으로 추존하여 분황제(焚黃祭)를 행한 후, 이전의 위패는 북쪽 기단 아래에 묻고 새로운 위패를 써서 경복궁 내 연은전에 옮겨 봉안했다. 연은전에서의 의례는 문소전(文昭殿)의 예에 따랐다. 위패를 연은전에 모시고 종묘에 부묘한 후, 연경궁의 의묘는 회간대왕의 영정·시고·고명을 안치하는 곳이 되었다. 의묘의 앞길에는 신문(神門)과 하마비(下馬碑)를 세웠다.

의묘의 훼철이 언제 이루어졌는지는 모른다. 임진왜란 시 월산대군의 제택이 행궁으로 사용되었다는 기록으로 보아 임진왜란을 전후하여 그 기능을 상실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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