융릉(隆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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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추존왕 장종(장조)와 비 헌경왕후(獻敬王后) 홍씨(洪氏)의 능.

개설

장종(莊宗)은 영조의 둘째 아들 사도세자(思悼世子)로, 사후에 왕으로 추존되고, 황제로 추존되어 장조(莊祖)가 되었다. 1762년(영조 38)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승하하자, 양주배봉산에 ‘수은묘(垂恩墓)’를 조성하였다. 사도세자의 아들인 정조는 1776년 즉위한 직후 부친의 존호를 ‘장헌(莊獻)’이라 하고 묘를 영우원(永祐園)으로 승격했으며, 1789년(정조 13)에는 수원으로 이장하고 현륭원(顯隆園)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그 뒤 1899년(고종 36)에는 장헌세자를 장종으로 추존하고, 현륭원을 융릉(隆陵)으로 격상하였다. 같은 해에 다시 묘호를 장종에서 장조로 바꾸고 황제로 추존하여 장조의황제(莊祖懿皇帝)라 하였다(『고종실록』 36년 9월 1일)(『고종실록』 36년 12월 7일).

헌경왕후는 홍봉한(洪鳳漢)의 딸로, 1744년(영조 20)에 10세의 어린 나이로 세자빈에 책봉되었다. 사도세자 사후에 영조에 의해 혜빈(惠嬪)에 봉해졌고, 정조가 즉위한 뒤 혜경궁(惠慶宮)이 되었다. 1815년(순조 15) 12월 15일 창경궁 경춘전에서 승하하여 현륭원에 안장되었다. 이후 1899년(광무 3)에 장헌세자가 장종으로 추존됨에 따라 헌경왕후가 되었으며, 같은 해에 다시 장조로 추존됨에 따라 헌경의황후(獻敬懿皇后)로 되었다. 융릉은 오늘날 경기도 화성시에 자리 잡고 있으며, 1970년에 정조와 효의왕후(孝懿王后)의 능인 건릉(健陵)과 더불어 사적 제206호로 지정되었다.

조성 경위

세자가 훙서한 직후 영조는 세자의 위호를 회복하고, 시호를 ‘사도(思悼)’로 정했다(『영조실록』 38년 윤5월 21일). 양주배봉산 아래에 갑좌향으로 묘를 조성하고, 묘호를 ‘수은’이라 하였다. 묘소의 조성은 묘소도감(墓所都監)에서 담당하였는데, 총책임자인 도제조(都提調)는 좌의정 홍봉한이 맡았다. 석물과 정자각은 사도세자의 맏아들인 의소세손(懿昭世孫)의 의소묘(懿昭墓)의 예를 따르되, 석인과 혼유석은 좀 더 크게 하였다.

사도세자의 아들인 정조는 1776년 즉위한 뒤 곧바로 사도세자의 위상을 회복하는 데 주력하였다. 시호를 장헌으로 고치고 묘소를 영우원으로 격상하였으며, 사당인 수은묘(垂恩廟)를 경모궁(景慕宮)으로 높였다(『정조실록』 즉위년 3월 20일). 정조는 영우원과 경모궁에 관한 여러 의식 및 절차를 기록한 『궁원의(宮園儀)』를 편찬하게 하였다. 또 제사를 올리는 의식 절차와 담당 관원의 격도 높였다. 영우원의 담당 관원은 영조대에 조영된 순강원(順康園)과 소령원(昭寧園)의 관례에 따르도록 하였다. 그러나 1779년(정조 3)에 이를 개정하여 원관(園官)을 별감(別監), 참봉(參奉)으로 격상해, 그 위격이 태묘보다는 낮지만 다른 궁(宮)보다는 높도록 하였다(『정조실록』 3년 8월 30일).

1789년(정조 13)에는 금성위(錦城尉)박명원(朴明源)이 영우원은 결함이 많다며 이장할 것을 청하였다. 원소(園所)를 옮길 후보지로 여덟 곳이 거론되었는데, 그중 ‘반룡이 여의주를 희롱하는 형국’이라고 알려진 수원 읍내 관가 뒤편 자리로 결정하였다. 이곳은 예전부터 최고의 길지로 손꼽히는 세 곳 가운데 하나였다. 세 곳 중 두 곳에는 이미 영릉(寧陵, 여주 홍제동)과 영조의 능인 원릉(元陵, 건원릉의 오른쪽)이 들어서 있었고, 하나 남은 수원의 땅은 이전에 효종의 영릉(寧陵)을 천장할 때도 길지로 논의된 바가 있었다. 이곳에 원을 조성하기 위해 수원부의 읍치를 이전하는 일을 병행하였다. 박명원의 상소가 있은 지 불과 9일 후에 원소 자리에 봉표를 하였으며, 새로운 원의 이름을 현륭원(顯隆園)이라고 고쳤다(『정조실록』 13년 8월 9일). 같은 해 10월 수원부 화산(花山)으로 천장(遷葬)을 마쳤다(『정조실록』 13년 10월 7일).

한편 현륭원 조성 당시 정조는 사도세자가 묻힌 왼쪽 자리를 비워 놓았다. 그에 따라 1815년(순조 15) 혜경궁이 승하하자, 바로 이곳에 합부(合祔)하기로 하였다(『순조실록』 15년 12월 18일).

조성 상황

현륭원을 조성할 때, 이전 영우원의 석물이 상태가 좋지 않아 이를 옮겨 오지 않고 새로 제작하였다. 현륭원은 비록 세자의 묘에 해당하는 원(園)이었지만, 석물의 제도와 격식은 왕릉에 버금갈 정도였다. 봉분에는 효종의 영릉 이후 폐지했던 병풍석을 두르고 모란 무늬를 새겼으며, 연꽃 봉오리 모양의 인석(引石)을 설치했다. 또한 원에는 설치하지 않는 무인석도 배치하였다.

혜경궁을 부장할 때 총책임자는 영의정김재찬(金載瓚)이 맡았다. 혜경궁을 현륭원에 합부하는 것은 정조가 현륭원 조성 당시에 정한 바였으므로, 따로 후보지를 따로 거론하지 않고 현륭원을 봉심하는 것으로 그쳤다. 또한 하나의 봉분에 합장한 까닭에 석물을 크게 추가하지 않고, 병풍석 7칸을 새로 만들고 지석과 표석만을 제작하였다.

변천

고종은 현륭원을 융릉으로 추숭하고, 이후 친히 음기(陰記)를 써서 표석을 고쳐 세웠다(『고종실록』 41년 5월 25일).

관련 사항

정조는 사도세자의 묘를 수원부의 읍치가 있는 화산 아래로 옮겨 모시면서 읍치를 팔달산 아래로 이전하였다(『정조실록』 13년 7월 15일). 그리고 현륭원을 조성한 뒤 수원부가 관방(關防)으로서 더욱 중해졌다 하여, 1793년(정조 17) 수원부를 화성(華城)으로 바꾸고 수원부사(水原府使)를 유수(留守)로 승격했으며 화성을 축조하였다(『정조실록』 17년 1월 12일).

참고문헌

  • 『사도세자묘소도감의궤(思悼世子墓所都監儀軌)』
  • 『헌경혜빈현륭원원소도감의궤(獻慶惠嬪顯隆園園所都監儀軌)』
  • 『현륭원원소도감의궤(顯隆園園所都監儀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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