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기호발(理氣互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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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리학의 심성론(心性論)에서 정(情)에 속하는 사단과 칠정을 각각 리(理)의 발현과 기(氣)의 발현으로 구분하는 이황의 학설.

개설

이황(李滉)은 사단(四端)은 리(理)의 발이고 칠정(七情)은 기(氣)의 발이라고 하여 서로 대립 분속하여 리기호발설(理氣互發說)을 주장하였다. 이에 대해 기대승(奇大升)이 리와 기는 서로 분리되지 않는다는 원칙에서 이의를 제기하자, 이황은 "사단은 리가 발함에 기가 따르는 것이요, 칠정은 기가 발함에 리가 타는 것이다."라고 고쳐 자신의 주장을 수정하였다. 하지만 처음 주장했던 리기호발설을 저버리는 것이 아니고 더욱 견고하게 하였던 것이다. 이이(李珥)는 사단과 칠정 모두 기가 발함에 리가 타는 것이라고 문제를 제기하면서, 이황의 리기호발설은 비판받기에 이르렀으나, 향후 사단칠정론은 심화되면서 이론적으로 발전되었다.

내용 및 특징

성리학에서 정(情)은 성(性)이 외물에 느끼고 응하여 발현한 것이다. 이것을 ‘성발위정(性發爲情)’이라 하는데, 이 발현한 정을 사단과 칠정으로 구분한다. 이에 대한 리기론적 설명은 『주자어류』에서 보였으나, 그 설명은 단순한 언명에 불과하였다. 조선의 정지운(鄭之雲)은 「천명도(天命圖)」를 만들고 인간의 본성이 발현된 감정에서 "사단은 리에서 발하고 칠정은 기에서 발한다[四端發於理 七情發於氣]"라 하고서, 이황에게 감수를 요청했다. 이황은 "사단은 리의 발이고, 칠정은 기의 발이다[四端理之發 七情氣之發]"라고 수정하였다. 이를 본 기대승(奇大升)이 이의를 제기하면서 7년에 걸친 논변이 시작되었다.

기대승은 이황에게 사단과 칠정은 서로 리발과 기발로 분속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언명하며 사단은 칠정의 선일변(善一邊)이라는 주장을 하였다. 이러한 논리에는 리와 기가 서로 분리되지 않는다는 원칙에 의거한 것이었다. 이황은 그 원칙에는 동의하지만, 동시에 사단과 칠정의 근원과 외부에 느껴 응할 적에 중점이 되는 것을 지적하면 사단과 칠정을 리발과 기발로 분속시키는 것이 잘못이 아니라 하였다.

이황은 『주자어류』의 분속시킨 것을 발견하고 확신을 하면서도 기대승의 리와 기가 분리되지 않는 원칙을 수용하여 "사단은 리가 발함에 기가 따르는 것이요, 칠정은 기가 발함에 리가 타는 것이다[四端理發而氣隨之 七情氣發而理乘之]"라고 고쳐 그의 주장을 완화시켰다. 그러나 사단이 리발설이라고 하는 주장은 끝까지 피력하였다. 리의 발현성으로 사단을 설명하는 이황은 인간 감정의 순수한 발현으로서의 사단을 강조하여 인간의 선의지(善意志)와 이성을 지켜가려고 하였다.

이황 사후, 성혼(成渾)은 이황의 리기호발설이 인심도심설(人心道心說)에 비견된다고 하는 논지로 이이(李珥)에게 질정한다. 그러나 이이는 리와 기가 서로 분리되지 않는 대원칙에 의거하여 리발을 부정하고 기발을 인정한다. 이는 기대승의 견해에 동조하는 것이었다. 특히 이이는 활동성과 작용성이 리가 발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 하여, "사단과 칠정은 모두 정으로, 정이 발할 때 발하는 것은 기요, 발하게 하는 까닭은 리이다."라고 하여, 기발리승일도설(氣發理乘一途說)을 주장하게 된다. 이이의 이러한 주장은 작위가 없고 동정이 없는 소이연자(所以然者)인 리를 동정과 작위가 있는 기로 불식시켜 리의 위상을 올바르게 확립하려는 것이었다.

이황의 리기호발설은 『주자어류』에 보인 언명을 따르면서 인간의 순수한 선의지로서의 사단을 리의 발현임을 강조하여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세계를 확립하려는 것이었다. 이러한 철학적인 정신이 이황 성리 사상의 핵심이라 하겠다.

변천

효종대에 경상도 진사 유직 등 9명이 이이와 성혼의 문묘 종사를 반대하는 상소를 올린다. 그들은 이이가 기(氣) 자만을 주장하여 기를 리로 알았다고 하고 마음도 기이므로 사단과 칠정이 모두 기에서 생긴다고 하였는데, 이는 도(道)와 기(器)를 변별하지 않은 육구연(陸九淵)의 견해에서 나온 것으로 여겼다. 이황은 도(道)의 체(體)를 분명하게 보고, 인성에 대해 힘써 공부하여, 주희(朱熹)의 요결(要訣)을 밝혀서 「천명도(天命圖)」와 「심통성정도(心統性情圖)」를 지어 체(體)와 용(用), 현(顯)과 미(微)를 섬세하고도 극진하게 규명하였고, 사단과 칠정의 구분에 있어서도 더욱 그 오묘함을 극진히 하여, 백세 이후 성인이 다시 태어난다 해도 의혹이 없을 것이라고 하였다. 그들에 의하면, 이이는 이황 사후 이황의 학문을 비판하고 심지어는 "주자가 참으로 리와 기가 호발(互發)하여 각기 상대해서 나오는 것이라고 하였다면 주자도 잘못한 것이니 어찌 주자라 하겠는가?" 하였으니, "편견과 착각으로 감히 현인들을 이토록 헐뜯을 수가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특히 주희의 설 가운데 리가 있은 연후에 기가 있고, 리와 기는 결단코 둘이며, 사단(四端)은 리에서 발하고 칠정(七情)은 기에서 발한 것이라는 것을 들어 이황의 리와 기가 호발한다는 것이 정당하다는 것을 주장하며 리와 기를 하나로 여기는 이이의 성리설을 비판하며 문묘에 배향할 수 없음을 강력히 주장하였다(『효종실록』 1년 2월 22일).

숙종대에 참찬관(參贊官)유명천(柳命天)이 "이황은 ‘기가 발함에 리가 따르는 것이다’라고 했으니 맹자(孟子)의 말과 서로 부합되고, 이이는 ‘리와 기가 서로 발한다’고 했으니 이는 고자(告子)의 말에 가까운 것입니다."라고 하자, 언관은 유명천이 올바로 깨닫지 못하고 거칠고 두서없이 하는 것이라고 비판하였다(『숙종실록』 3년 5월 14일). 박성의(朴性義) 등이 이이와 성혼을 무함하는 상소를 올렸다. 그 내용 가운데 이이는 ‘기가 발함에 리가 탄다’는 학설을 가지고 이황의 ‘사단은 리가 발함에 기가 따르는 것이며 칠정은 기가 발함에 리가 탄다’는 것은 리와 기가 함께 발하는 병통이 있다고 하고, "정자와 주자의 견해가 간혹 틀린다고 하여 주자의 학설이 정자의 학설과 어긋난다고 말하였다."고 한 것이 있었다. 박성의 등은 주자를 공격하고 배척한 이이를 비판하였다. 부응교(副應敎)송광연(宋光淵), 교리(校理)이돈(李墩) 등이 박성의 등의 상소 내용을 분변하는 상소를 올리자, 숙종은 박성의의 음험한 말은 익히 알고 있다고 하면서 죄를 더할 필요가 없다고 하였다(『숙종실록』 7년 9월 30일).

정조는 내각의 여러 신하들과 『근사록』과 『심경』을 강하면서 리발과 기발이 되는 호발을 토론했다. 정조는 사단과 칠정을 모두 정으로 여겼는데, "칠정만 말하면 되는 것을 맹자(孟子)는 무엇 때문에 사단을 말하였는가? 사단만 말하면 되는 것을 자사(子思)는 또 무엇 때문에 칠정을 말하였는가? 혹시 사단 이외에 다시 칠정이 있다는 것인가? 또 혹시 자사와 맹자가 말한 것이 각기 가리키는 것에 차이가 있어서 이렇게 사단이니 칠정이니 하고 다르게 말한 것인가?"라고 반문하였다. 나아가 정조는 "이황은 ‘사단은 리가 발함에 기가 따른 것이고 칠정은 기가 발함에 리가 타는 것이다’라고 하고, 이이는 ‘리와 기는 혼융(混瀜)된 것이므로 원래 서로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다. 마음이 움직이는 것은 정(情)이고 발동되게 하는 것은 기(氣)이다. 그러므로 발동되는 것은 리이지만 기가 아니면 발동되게 할 수 없고, 리가 아니면 발동되는 것이 없는 것이다.’라고 하였으니, 리발과 기발의 다름이 있게 된 것인가? 당시 학자들 사이에도 서로가 논란이 많았고, 지금에 이르러서는 논설이 서고(書庫)에 가득 찰 정도이니, 장차 어느 쪽을 따라야 할지를 모르겠다."고 하였다. 당시 김희(金憙)는 "칠정은 선·악을 겸하여 말한 것이고 사단은 단지 선 한쪽만을 따라서 말한 것입니다. 때문에 부연하면 칠정이 되고 요약하면 사단이 되는 것이므로 사단·칠정은 본래 두 가지의 정(情)이 아닌 것입니다. 그러나 전후 두 현인의 말이 각기 같지 않아서 지금까지 그에 관한 논설이 분분합니다만, 신은 이이의 말을 정론으로 여기고 있습니다."라고 하였다(『정조실록』 5년 3월 18일).

이후 정조는 김인후(金麟厚)를 문묘에 종사하는 의식을 행하면서 선포한 교서에서 "리와 기가 서로 발한다는 변론은 대현(大賢: 이황)의 학설을 절충한 것이고, 도(道)와 기(氣)가 하나라고 주장하는 여러 사람들의 잘못된 논의를 분석해내었다. 윤리를 자신의 책임으로 여겨 지극히 공명정대한 입장을 지켜나갔으며, 법규만을 따라 하학상달(下學上達)을 실천하였으므로 ‘백세의 스승’이라는 평이 이미 한 시대의 공론으로 되어 있었다."(『정조실록』 20년 11월 8일)라고 하여 김인후가 이황의 학설을 계승했다고 평가하면서 그의 문묘 종사가 마땅함을 역설하였다.

참고문헌

  • 『퇴계전서(退溪全書)』
  • 류정동, 「사칠논변(四七論辨)의 전말과 미해결 문제」, 『대동문화연구』13,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 1979.
  • 유교사전편찬위원회, 『철학사전』, 중원문화, 1987.
  • 윤사순, 『한국유학사』, 지식산업사, 2012.
  • 현상윤 저·이형성 교주, 『현상윤의 조선유학사』, 심산, 2010.
  • 철학사전편찬위원회, 『유교대사전』, 박영사, 19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