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학상달(下學上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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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로 일상적인 것을 배워 위로 천리를 깊이 통달한다는 것.

개설

하학상달(下學上達)은 『논어(論語)』「헌문(憲問)」에서 공자가 자공에게 "하늘을 원망하지 않고 사람을 탓하지 않으며 아래로는 일상적인 것을 배워 위로 깊이 천리를 통달하니, 나를 아는 자는 하늘뿐이다[不怨天 不尤人 下學而上達 知我者 基(其)天乎]"라고 한 데에서 비롯되었다. 일상적인 것을 배운다는 하학은 예(禮), 악(樂), 사(射), 어(御), 서(書), 수(數)와 같은 육예(六藝)를 익히는 것을 말하며, 상달은 하학을 배운 뒤에 심오한 의리와 우주의 진리에 나아가서 천리를 알고 즐기며 섬기는 경지에 이른다는 것이다. 주자는 정자(程子)의 말을 빌려 하학상달은 학문의 요점으로서, 아래로 인간의 일을 배우면 위로 천리를 통달하게 되는데, 익히기만 하고 살피지 않으면 또한 위로 통달할 수 없다고 하였다. 결과적으로 하학상달은 아래로 인사를 배우고 위로 천도에 일치시키는 천인합일의 방도를 제시해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내용 및 특징

조선조는 특히 인륜 질서의 실천적인 가르침을 담고 있는 『소학』을 공부하여 하학 공부를 충분히 익힌 다음 대학의 수기치인의 학문에 이르도록 하였다. 조선초기에 권근은 『소학』을 읽은 뒤에 다른 공부에 나아가야 하며, 성균관에 입학하는 자도 『소학』을 충분히 익혔는가를 확인한 뒤 과거에 응시해야 한다고 하였다.

당시 하학상달을 중시했던 것은 사림이나 사림을 비판하는 측이나 마찬가지였다. 조광조의 스승인 김굉필은 소학동자로 자처할 만큼 철저히 소학의 가르침을 따랐으며, 조광조나 김안국 등 사림들은 『소학』의 가르침을 향촌 사회에까지 널리 보급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김안국은 당시 경상도관찰사로서 『소학언해』를 발간하여 민간에 널리 보급하였다. 반면에 1520년(중종 15) 사간(司諫)남세준(南世準) 등은 "『소학』을 공부하는 도는 순서대로 수업하여 낮은 일상생활에서부터 높고 깊은 곳으로 나아가야 하고, 학문이 넉넉해진 뒤에 벼슬해야 하는데, 조급하게 벼슬하는 데 급급하였다."(『중종실록』 15년 1월 19일)고 하며 조광조 등이 하학 공부를 제대로 하지 않았다고 비난하였다.

하학상달의 기풍은 조선후기에도 중시되었다. 정조대에 김인후가 문묘에 종사되었는데, 정조는 김인후의 공부가 전적으로 『대학』과 『소학』 두 책에 있으며, 법규만을 따라 하학상달을 잘 지켰으므로 백세의 스승이 될 만하다고 하였다(『정조실록』 20년 11월 8일).

참고문헌

  • 한국사상연구회, 『조선유학의 개념들』, 예문서원, 2002.
  • 유교사전편찬위원회 편, 『유교대사전(儒敎大辭典)』, 박영사, 1990.
  • 손인수, 「한훤당 김굉필의 교육사상」, 『정신문화연구』3, 한국학중앙연구원, 19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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