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농(李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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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411년(태종 11)∼1461년(세조 7) = 51세]. 조선 전기 세종~세조 때 활동한 왕자. 태종(太宗)이방원(李芳遠)의 서출 8남 13녀 중에서 제 4왕자. 봉작(封爵)은 근녕군(謹寧君)이다. 본관은 전주(全州)이고 주거지는 서울이다. 어머니 신신빈(辛信嬪)는 영월 신씨(寧越辛氏)신영귀(辛永貴)의 딸이다. 신신빈가 낳은 3남 7녀 중에서 맏아들인데, 함녕군(諴寧君)이인(李䄄)과 온녕군(溫寧君)이정(李䄇)의 동복아우이다. 부인 하양 허씨(河陽許氏)는 관찰사(觀察使)허지혜(許之惠)의 딸이다. 아들 셋과 딸 여섯을 두었다.

세종시대 활동

1422년(세종 4) 5월 아버지 태종이 승하하고, 어머니 신녕궁주(信寧宮主)신씨(辛氏)는 세종에게 알리지 않고 머리를 깎고 여승이 되었다. 1424년(세종 6) 10월 근녕군이 되었고, 1426년(세종 8) 종2품상 가정대부(嘉靖大夫)근녕군이 되었다. 1430년(세종 12) 12월 3일 양녕대군(讓寧大君)이제(李禔)를 비롯하여 세종의 여러 형제들이 봉군될 때, 근녕군이 되었다. 1435년(세종 17) 어머니 신녕궁주의 상을 당하였다. 1447년(세종 29) 윤4월 사위를 맞이하자 왕실에서 안장을 갖춘 말을 하사하였다. 1455년(단종 3) 단종이 수양대군(首陽大君)에게 양위를 하자, 종친과 백과들이 모여서 세조의 정난공신(靖難功臣)에 맹세할 때 홀로 참여하지 않고, 관악산 만주대(巒主臺)에 올라 탄식하였고 한다.[『고양군지(高陽郡誌)』] 1461년(세조7) 11월 15일에 향년 51세로 돌아갔다.

묘소와 후손

시호는 희의(僖懿)이다. 묘소는 현재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대자동 산17번지에 있다. 기다란 봉분은 뒤쪽을 둔덕[莎城]으로 둘러싸여 있다. 봉분 앞에는 묘비가 세워져 있는데 오랜 세월동안 훼손되어 비문을 알아볼 수 없다.

부인 하양 허씨는 허지혜의 딸인데, 3남 6녀의 자녀를 두었다. 장남은 옥산정(玉山正) 이제(李躋)이고, 차남은 달천정(達川正) 이윤(李踚)이다. 3자는 우산정(牛山正) 이종(李踵)인데, 온녕군(溫寧君)이정(李䄇)의 후사가 되었다. 장녀는 신상하(辛尙夏)의 처이고, 차녀는 김현뢰(金賢賚)의 처이며, 3녀는 정석년(鄭錫年)의 처이다. 4녀는 정수(鄭穗)의 처이고, 5녀는 김희(金僖)의 처이며, 6녀는 정윤공(鄭允功)의 처이다.

참고문헌

  • 『세종실록(世宗實錄)』
  • 『단종실록(端宗實錄)』
  • 『세조실록(世祖實錄)』
  • 『선원강요(璿源綱要)』
  • 『선원계보(璿源系譜)』
  • 『선원계보기략(璿源系譜紀略)』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청음집(淸陰集)』
  • 『고양군지(高陽郡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