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제복(公除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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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상(國喪)을 당하여 조의(弔意)를 표하는 뜻으로 공무(公務)를 볼 때 입는 조복(弔服).

개설

국상을 당하여 공무를 보지 않는 공제(公除)의 기간이 지난 후에 평상시 관복을 입지 않고 조의를 표하기 위해 입는 관복이다.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공제의 기간은 조금씩 차이를 보이지만 대개 졸곡(卒哭)까지로 잡으며 졸곡 뒤에 왕은 시사복(視事服)을 입고, 백관들은 공제복(公除服)을 입는다(『인조실록』 10년 10월 9일). 곧 신하의 공제복과 왕의 시사복은 용도가 같은 옷이다[『광해군일기』 즉위 6월 24일 2번째기사]. 서인들은 검은 옷을 입었다[『광해군일기』 즉위년 6월 25일 첫 번째기사]. 종친 이하 문무백관의 공제복은 포단령의(布團領衣), 생포과모(生布裹帽), 생포과각대(生布裹角帶), 백피화(白皮靴)로 구성된다.

연원 및 변천

공제는 한 문제가 27일 만에 상복을 벗은 유제(儒祭)를 말한다. 27일은 복을 벗는 달을 날로 바꾼[以日易月] 것이다. 공제라고 한 것은 천하를 공(公)으로 삼아 겉으로는 비록 상복을 벗고 정사를 보살피나 어버이를 친애하는 생각이 마음속에 맺혀 있으므로 오히려 3년 동안의 사모를 마치는 것이니, 공적으로는 복을 벗으나 사적으로는 벗지 않는 것이다(『연산군일기』 6년 10월 28일).

국상에 따르는 복제의 특성은 일반 상복(喪服) 제도와 달리 계급을 표현하였고, 국상만의 특별한 상황이 고려되어 상복 이외에 시사복, 공복(公服), 연거복(燕居服) 등이 규정되었다. 또한 상례의 진행에 따라 옷을 바꾸어 입는 변복(變服) 제도를 적용했다.

『국조속오례의(國朝續五禮儀)』에 의하면 대비 상을 당하여 왕은 재최(齊衰) 3년의 복을 입는데 공제 후에는 포포(布袍), 포과익선관(布褁翼善冠), 포과오서대(布褁烏犀帶), 백피화를 착용한다. 왕은 왕비 상, 왕세자 상에 재최 기년의 복을 입으며 공제 후에는 백포(白袍), 익선관, 오서대, 백피화를 신는다. 왕세자도 참최(斬衰) 3년의 공제 후에 왕과 동일한 포포, 포과익선관, 포과오서대, 백피화를 신으며, 재최 기년의 시사복도 왕과 동일하다.

영조대에 예제가 개편되기 이전인 『세종실록』「오례」나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에 의하면 왕세자는 졸곡 후 시사복으로 백포(白袍), 익선관, 오서대, 백피화를 착용토록 했다.

종친 이하 문무백관은 왕의 승하 시 참최 3년의 복을 입으며 공제복으로 포단령의, 생포과모, 생포과각대, 백피화를 신는다. 대비 상, 왕세자 상 등에는 재최 기년의 복을 입으며 공제복으로 포단령의, 생포과모, 생포과각대, 백피화를 신는다.

형태

왕과 왕세자의 공제 후 시사복은 포포, 포과익선관, 포과오서대, 백피화로 구성된다. 평상시 집무복이 곤룡포, 익선관, 대, 화로 구성되듯이 시사복의 구성 요소에는 변화가 없으나 소재에 변화를 주었다. 곤룡포를 베로 짓고, 익선관과 오서대를 베로 싸며, 화를 백피로 만들었다. 신하의 공제복 역시 평상 집무복인 사모, 단령, 대, 화의 구성 요소와 동일하지만 베로 단령을 짓고, 사모와 각대를 베로 싸며, 화를 백피로 만들었다.

용도

국상 중에 공무를 볼 때 입는다. 신하의 공제복과 왕의 시사복은 용도가 같으며 국상 중에 조의를 표하기 위하여 입는 신하의 공복이 이에 해당한다.

참고문헌

  • 『국조속오례의(國朝續五禮儀)』
  •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
  • 『상례보편(喪禮補編)』
  • 이영주, 「조선시대 國喪 服制 연구」, 동덕여자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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