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언국(洪彦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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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생몰년 미상. 자는 공좌(公佐)이다. 본관은 부계(缶溪)인데, 주거지는 경상도 함창(咸昌)이다. 아버지는 의정부 좌참찬(左參贊)홍귀달(洪貴達)이고, 어머니 상주김씨(尙州金氏)는 김숙정(金淑貞)의 딸이다. 성균관 직강(直講)홍언충(洪彦忠)의 막내 동생이다.

갑자사화와 홍언국

1495년(연산군1) 증광(增廣) 생원시(生員試)에 2등으로 합격하였다. 음보로 참봉(參奉)에 임명되었는데, 1504년(연산군10) <갑자사화(甲子士禍)>가 일어날 때까지 아버지를 모시고 함께 살았다. 그의 딸이 미모가 뛰어나서 이를 탐한 연산군이 당장 입궁(入宮)시키라고 강요하였으나, 홍귀달은 여러 가지 핑계를 대고 거절하였다. 그러자 연산군이 대노하여 홍귀달을 함경도 경원(慶源)으로 유배하고, 그 아들 4형제도 모두 잡아다가 형신(刑訊)하고 귀양을 보냈다. 그때가 바로 <갑자사화>가 일어나서, 연산군의 생모 윤씨(尹氏)를 폐위할 때 간여한 모든 신하들에게 참혹한 형벌을 내리던 때였다. 아버지 홍귀달은 귀양 가던 도중에 단천(端川)에서 교형을 당하였고, 홍언국은 넷째 형 홍언충과 함께 거제도(巨濟島)에 유배되었는데, 함께 귀양살이하면서 병약한 형을 지성으로 간호하였다. 1506년 <중종반정(中宗反正)이 일어나자 유배지에서 석방되어 고향 함창으로 돌아왔는데, 그는 과거를 보지 않고 고향에서 학문 연구와 후진 양성에 힘을 썼다. 조정에서 참봉(參奉)에 다시 임명하였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문장(文章)과 지조(志操)로 명성이 있어 사림(士林)에서 그를 존경하였다.

성품과 일화

홍언국의 성품과 자질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그는 집안의 가르침을 받아 날마다 학문을 닦는 데 힘쓰고, 당시의 명문 집안 인사들과 교유(交遊)하였다. 그는 독서하기를 좋아하였고 글씨를 잘 썼다. 그의 필법(筆法)이 절묘하여, 그의 형 홍언충과 함께 명필(名筆)로 소문이 났으나 불행히도 전란을 겪으면서 작품이 모두 없어져버렸다. 그가 쓴 글씨 중 아버지 홍귀달의 신도비만 경상도 문경 전촌리(錢村里: 율곡리)에 남아 있다.

그가 거제도로 유배되었을 때 용재(容齋)이행(李荇), 읍취헌(挹翠軒)박은(朴誾), 학고(鶴皐)이장곤(李長坤) 등 유명한 인사들도 이 섬에 귀양을 와 있었으므로, 그들과 함께 자연스레 어울렸다. 그러다가 1516년 <중종반정>으로 섬에서 풀려나서, 무사히 고향집으로 돌아왔다. 그의 이후 행적에 관하여 홍언국의 「유사(遺事)」에서 “과거 공부를 그만두고 산수(山水)를 유람하면서 지내다가, 죽을 때 자기 명정(銘旌)에 ‘진사(進士)’라고 쓰도록 명하였다”라고 전한다. 그러나 『중종실록(中宗實錄)』에서는, 1509년(중종4) 9월에 사간원에서 그가 “유배지에서는 술을 마시고 고기를 먹었으며 석방된 후에는 첩과 함께 매와 개를 끌고 여러 곳을 돌아다녔으니, 추국하라”며 그를 탄핵한 기사를 전하고 있다.

관력, 행적

참고문헌

  • 『연산군일기(燕山君日記)』
  • 『중종실록(中宗實錄)』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국조방목(國朝榜目)』
  • 『수헌집(睡軒集)』
  • 『농암집(聾巖集)』
  • 『이평사집(李評事集)』
  • 『충재집(冲齋集)』
  • 『곡운집(谷雲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