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엽(權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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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574년(선조7)∼1650년(효종1) = 77세]. 조선 중기 선조~인조 때의 문신. 초명(初名)은 권계(權*)인데, 자는 제중(霽仲)이고, 호는 구사(龜沙)이다. 본관은 안동으로, 권오(權悟)의 아들이고 권론(權碖)의 아버지이다. 이국주(李國柱)의 외손이고, 영의정남구만(南九萬)의 외조부이다.

선조~광해군 시대 활동

선조 말년에 성균관에 뽑혀 들어가서 수학하였으나, 음보(蔭補)로 광릉(光陵)참봉(參奉) · 내섬시(內贍寺)봉사(奉事), 한성부참군(漢城府參軍)이 되었다. 41세 되던 1615년(광해군7) 알성(謁聖) 문과(文科)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호군(護軍) · 분 병조 참의를 역임하고, 1617년(광해군9) 평해군수(平海郡守)로 나갔다. 그때 박정길(朴鼎吉)의 사주를 받은 사형수(死刑囚)에게 무고(誣告)를 당하여, 임기를 채우지 못하고 면직(免職)되었다. 그는 선영(先塋)이 있는 충주(忠州) 누암강(樓岩江)으로 돌아가서 집을 짓고 살았다.

인조 시대 활동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 때는 상중(喪中)에 있어서 거사에 참여하지 못했으나, 1624년(인조2) <이괄(李适)의 난> 때 공주(公州)로 달려가서 인조를 호위하였다. 그 해에 동지사(冬至使) 겸(兼) 성절사(聖節使)로 임명되어, 해로(海路)를 통하여 중국 명(明)나라에 사신으로 갔다. 당시 압록강 북쪽이 여진족에게 점령당하여 바닷길로 중국과 왕래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1626년(인조4) 관반사(館伴使)에 임명되어 평양(平壤)으로 가서 명(明)나라 사신을 영접하였다. 1628년(인조6) 파주목사(坡州牧使)로 나가서 선정을 베풀어, 송덕비(頌德碑)가 세워졌다. 1635년(인조13) 중추부(中樞府)첨지사(僉知事)에 임명되었는데, 1636년(인조14)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인조를 호위하고 남한산성(南漢山城)으로 들어가서 청나라 군사와 싸웠다. 그 뒤 강릉부사(江陵府使)로 나갔는데, 임금을 호위한 공로로 가선대부(嘉善大夫)로 승진하였다. 그해 동지사 겸 성절사에 임명되어 바다를 건너 명나라에 다녀왔다. 1627년 <정묘호란(丁卯胡亂)>이 일어나자 충주에서 의병(義兵)을 일으켰으나, 강화(講和)가 체결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의병을 해산했다. 1639년(인조17) 오위도총부(五衛都摠府)부총관(副摠管)에 임명되었다가, 고성군수(高城郡守)로 나갔는데, 1640년(인조18) 6월 고성 임지에서 세상을 떠나니 향년 77세였다. 저서로는『구사집(龜沙集)』 · 『구사금강록(龜沙金剛錄)』이 있다.

무덤과 제향

묘소는 충청도 충주 검단리(檢丹里)에 있는데, 외손자 남구만이 지은 묘표(墓表)가 있다.

관력, 행적

참고문헌

  • 『선조실록(宣祖實錄)』
  •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 『인조실록(仁祖實錄)』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약천집(藥泉集)』
  • 『여암유고(旅菴遺稿)』
  •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