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위(文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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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554년(명종9)∼1631년(인조9) = 78세]. 조선 중기 선조∼인조 때의 문신이고 경상도 의병장. 자는 순부(純夫), 호는 모계(茅溪)이다. 본관은 단성(丹城)이고, 세거지는 경상도 거창(居昌)이다. 아버지는 통정대부(通政大夫)문산두(文山斗)이고, 어머니 함양오씨(咸陽吳氏)는 선교랑(宣敎郞)오세평(吳世平)의 딸이다. 처음에 남명(南冥)조식(曺植) · 덕계(德溪)오건(吳健)을 사사하다가, 나중에 한강(寒岡)정구(鄭逑)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임진왜란 때 의병 활동

1592년(선조25) 4월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났을 때 그의 나이가 39세였는데, 그의 스승 정구의 연락을 받고 고향 거창에서 의병을 모집하여 고령(高靈)의 의병장(義兵將)김면(金沔)과 합류하였다. 김면은 정구와 절친한 사이였는데, 모두 남명조식의 제자들이었다. 그해 6월 김면은 문위를 작전 참모로 삼고, 곽준(郭䞭) · 윤경남(尹景男) · 박정번(朴廷璠) · 유중룡(柳中龍)을 참모로 삼아 각 지역에 보내 의병을 모집하고, 박성(朴惺)을 서기(書記)로 삼아 군량미를 책임지게 하였다. 김면 · 문위의 고령 · 거창 의병들은 왜적을 우지(牛旨)에서 방어하다가 진주목사김시민(金時敏)의 관군과 함께 지례(知禮)에서 싸워서 역전승을 거두고, 다시 무계(茂溪)에서 크게 승리하였다. 김면이 승리를 거둔 것은 문위가 참모로서 작전을 세우고, 각 지방의 관군 및 의병과 긴밀하게 협력하였기 때문이었다. 그해 11월 조정에서 김면을 의병대장으로 임명하였다가 1593년(선조26) 1월 그를 경상우도 병마사(慶尙右道兵馬使)에 임명하자, 문위는 그의 종사관이 되었다. 그때 경상도 관군과 의병을 이끌고 전라도와 충청도 의병과 연합하여 금산(金山)에 진주하여 진격할 준비를 하다가, 병마사김면이 전염병에 걸려 군중(軍中)에서 갑자기 죽었다. 김면의 유언에 따라 그의 죽음을 알리지 않고 문위가 대신하여 군사를 지휘하여 왜적과 싸워 대승을 거두고 나서, 비로소 병마사의 죽음을 발표하였다. 문위가 김면의 상사(喪事)를 의식대로 잘 치렀을 뿐만 아니라, 모든 뒷일을 맡아서 처리하고, 군사의 대오를 엄하게 정비하였으므로 사졸(士卒)들이 흩어질 생각을 감히 하지 못하였다. 그 해 5월에 그는 모친상을 당하여 군사를 넘겨주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선조 후반기 활동

1597년(선조30)에 부친상을 당하였는데, 효성이 지극하여 모친상을 끝마치고도 최질(衰絰)을 벗지 아니하고 있다가 다시 부친상 3년 상을 그대로 입었다. 상복을 벗고 고향 거창 모계리(茅谿里)에다 집을 짓고 제자들을 가르쳤는데, 10여 년 동안 길러 낸 수많은 제자들 가운데 과거에 급제하여 중앙의 관직에 진출한 사람도 많았다. 부제학(副提學)김우옹(金宇顒)이 그의 독실한 행실을 듣고 조정에 추천하였고, 재상 유성룡(柳成龍)도 자목관(字牧官: 수령의 관직)의 직임을 감당할 수 있다고 그를 추천하였다. 1604년(선조37) 동몽교관(童蒙敎官)에 임명되어, 서울에 올라가서 사대부(士大夫)의 자제(子弟)들을 가르쳤다. 임기가 만료되자 1607년(선조40)에 선공감(繕工監)주부(主簿)로 승진하였다가 스승 정구가 대사헌으로 있던 사헌부의 감찰(監察)이 되었다.

광해군∼인조 시대 활동

1608년 광해군이 즉위하자, 정인홍(鄭仁弘) · 이이첨(李爾瞻) 등 대북파(大北派)가 정권을 잡았다. <임해군(臨海君)의 옥사(獄事)>가 일어나자, 대사헌정구가 이에 반대하다가 귀양을 가게 되었다. 문위는 스승 정구를 구원하려고 상소하다가, 남명조식의 문하에서 동문수학하였던 영의정정인홍에 의하여 쫓겨나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는 벼슬에서 물러나 고향 거창 아린동(娥林洞)에 살았는데, 정인홍이 살고 있던 곳과는 겨우 30리 거리였다. 그와 정인홍은 서로 사귄 지가 오래 되었으므로, 대북파 사람들은 그가 하루아침에 정인홍과 교유를 끊어버리고 말을 듣지 않는 데 대하여 몹시 분노하였다. 그리하여 무고(無辜)한 옥사(獄事)를 일으켜서 문위를 연좌시키려고 도모하였다. 1617년(광해군9) 대간(臺諫)에서 문위가 정온(鄭蘊)을 두둔한다고 탄핵하니 마침내 사판(仕版)에서 그 이름이 삭제되었다. 이리하여 광해군 시대에 그는 고향 거창의 숲속에 파묻혀서 외부와 관계를 끊고 두문불출하며 독서에만 전념하였다.

1623년 3월에 <인조반정(仁祖反正)> 일어나고 바로 4월에 70세의 나이로 고령현감(高靈縣監)에 임명되었다. 두어 달 재직하다가 사임하고 고향으로 돌아와서 한가롭게 지내던 가운데 신미년(인조9) 12월 24일(양력으로 1632년) 병으로 거창의 본가에서 죽으니, 향년이 78세였다.

저서에 『모계집(茅溪集)』이 남아 있다.

성품과 일화

문위의 성품과 자질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그의 성품은 독실하고 어질며 후덕하였다. 어떤 어려운 일이 닥치더라도 근심하거나 한탄하지 않고, 오로지 학문하는 데에 전력을 다하였으며, 다른 사람에게 학문을 하라고 권면하였다. 광해군 시대에 그가 영의정정인홍과 교유 관계를 끊어버리고 고향에 은거하자 어떤 친구가 그에게 정인홍과 교유를 회복하도록 권유하였다. 그는 분연히, “나는 평생 벼슬을 구하려고 존귀한 사람의 집안 문전을 드나들지 않았다.”라며 거절하고, 독서에만 전념하였다.

묘소와 후손

묘소는 경상도 거창(居昌) 북쪽 다발산(多發山) 언덕에 있는데, 그의 친구 용주(龍洲)조경(趙絅)이 지은 묘지명(墓誌銘)이 남아있다.(『용주유고(龍洲遺稿)』 권14 「모계문선생묘지명(茅谿文先生墓誌銘)」) 거창의 용원서원(龍元書院)에 제향되었다. 첫째 부인은 성산이씨(星山李氏)이고, 둘째 부인은 밀양박씨(密陽朴氏)로 아들 문성후(文誠後)를 낳았다. 셋째 부인 거창신씨(居昌愼氏)는 2남 1녀를 낳았는데, 아들은 문경후(文敬後) · 문충후(文忠後)이다.

관력, 행적

참고문헌

  • 『선조실록(宣祖實錄)』
  • 『연산군일기(燕山君日記)』
  • 『인조실록(仁祖實錄)』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난중잡록(亂中雜錄)』
  • 『용주유고(龍洲遺稿)』
  • 『동계집(桐溪集)』
  • 『미수기언(眉叟記言)』
  •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
  • 『소호당집(韶濩堂集)』
  • 『덕계집(德溪集)』
  • 『용담집(龍潭集)』
  • 『약봉유고(藥峯遺稿)』