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춘무(朴春茂)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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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박춘무 |
한글표제 | 박춘무 |
한자표제 | 朴春茂 |
분야 | 인물 |
유형 | 정치·행정가/관료/문신/의병 |
지역 | 한국 |
시대 | 조선 중기 |
왕대 | 선조 |
집필자 | 박은화 |
호 | 화천당(花遷堂) |
시호 | 민양(愍襄) |
출신 | 양반 |
성별 | 남자 |
본관 | 순천(順天) |
주거지 | 청주(淸州) |
저술문집 | 『화천당집(花遷堂集)』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박춘무(朴春茂) |
총론
[?~? = ?]. 조선 중기 선조(宣祖) 때 활동한 문신이며, 의병장(義兵將)이다. 호는 화천당(花遷堂)이다. 본관은 순천(順天)이고, 거주지는 청주(淸州)이다.
선조 시대 활동
박춘무(朴春茂)는 찰방(察訪)을 거쳐,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창의사(倡義使)가 되어 의병(義兵)을 일으키고, 의병장 조헌(趙憲)과 함께 호서(湖西) 지방을 지키는데 큰 활약을 하였다. 1593년(선조 26) 3월에도 선거이(宣居怡) 및 허육(許王夏) 등과 함께 적을 차단하였다.[『선조실록(宣祖實錄)』선조 26년 3월 5일]
용병(用兵)에 능하였던 그는 의술(醫術), 특히 침구술(鍼灸術)이 뛰어나 허준(許浚)을 비롯하여, 이연록(李延祿)과 이공기(李公沂), 김영국(金榮國), 정희생(鄭希生), 양예수(楊禮守), 심발, 허임(許任) 등과 함께 의관(醫官)으로도 활약하였다.[『선조실록』선조 28년 4월 13일, 선조 28년 12월 28일, 선조 29년 5월 11일] 1596년(선조 29) 5월 이후 지방관인 임천군수(林川郡守)가 되어 <정유재란(丁酉再亂)> 때인 1597년(선조 30) 4월 중순까지 있었다.[『선조실록』선조 30년 4월 21일] 그러다가 같은 해 4월 하순에 내의원(內醫院)에서 세자에게 침을 놓기 쉽게 가까운 곳으로 그의 부임지를 옮길 것을 건의하였고, 이에 그는 서울과 거리가 가까운 인천부사(仁川府使)가 되었다.[『선조실록』선조 30년 4월 21일, 선조 30년 4월 23일] 그리고 선조 31년(1598) 10월 부평부사(富平府使)가 되었다.[『선조실록』선조 31년 10월 15일]
저서로는 그의 유언 등을 모은 3권 1책의 『화천당집(花遷堂集)』이 있다.
시호와 추증
시호는 민양(愍襄)이다. 후에 참찬(參贊)에 추증되었다.
참고문헌
- 『선조실록(宣祖實錄)』
- 『선조수정실록(宣祖修正實錄)』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고대일록(孤臺日錄)』
- 『난중잡록(亂中雜錄)』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약천집(藥泉集)』
- 『벽오유고(碧梧遺稿)』