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응척(高應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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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531년(중종26)~1605년(선조38) = 75세]. 조선 중기 명종(明宗)~선조(宣祖) 때의 문장가. 자는 숙명(叔明)·좌명(佐明)이고, 호는 두곡(杜谷)인데 스스로 호(號)를 취병(翠屛)이라 하였다. 본관은 안동(安東)이고 주거지는 경상도 선산(善山) 해평(海平)이다. 후계(後溪) 김범(金範)의 문인(門人)으로, 『대학(大學)』을 깊이 연구하여 천하의 사물과 고금의 모든 글을 모두 『대학』을 가지고 평론(評論)하려고 시도하였다.

명종~선조 시대 활동

1561년(명종16)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함흥교수(咸興敎授)로 부임하여 문회당(文會堂)을 고을의 치소(治所) 북쪽에다 짓고 북방의 젊은이들에게 글을 가르쳤다. 교서관(校書館)저작(著作)에 임명되었으나, 사임하고 고향 해평으로 돌아갔다. 1570년(선조3) 회덕현감(懷德縣監)에 부임하여 『전인보감(銓人寶鑑)』과 『강학방(講學方)』 등을 지었으나 모두 난리 통에 잃어버렸다. 1574년(선조7) 하양현감(河陽縣監)으로 임명되었다가, 사도시(司䆃寺)첨정(僉正)·성균관(成均館)직강(直講)으로 옮겼는데, 이때에 『서정록(西征錄)』과 「도자설(道字說)」을 지었다. 1577년(선조10) 이후백(李後白)의 추천으로 승문원(承文院)교검(校檢)에 임명되었다가, 임피현령(臨陂縣令)·예안현감(禮安縣監)을 거쳐서, 1585년(선조18) 상주제독(尙州提督)·안동제독(安東提督)을 역임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났으나, 전쟁 중에도 『안자서(顔子書)』를 지었다. 1596년(선조29) 조정의 논의가 그를 사유(師儒)의 직임에 임명하여야 한다고 하여, 성균관사성(司成)에 임명되었는데, 이때에 『신감집(神鑑集)』과 『비은발휘(費隱發揮)』를 지었다. 1605년(선조38) 경주제독(慶州提督)에 임명되었다가, 그해 8월 세상을 떠나니 향년(享年) 75세였다. 문집으로 『두곡집(杜谷集)』이 있다. 숙종(肅宗) 때 선산의 낙봉서원(洛峯書院)에 제향되었다. 최현(崔晛)이 지은 『인재집(訒齋集)』 권12에 그에 관한 글로서 「두곡선생 고공언행록(杜谷先生高公言行錄)」이 있다.

성품과 문장

고응척의 성품과 자질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그는 마음이 너그럽고 주장이 분명하였다. 학문을 터득하는 방법에 대해서 그는 스승의 가르침을 받지 않고 스스로 체득하는 것을 중시하였다. 먼저 글을 읽고서 외우더라도 반드시 그 뜻을 묵묵히 생각하고 이해하는 과정을 거치고, 다음으로 그 내용을 깊이 이해하더라도 반드시 그것을 좋아하고 즐거워하는 지경에 이르러야 한다고 그는 주장하였다. 평생 동안 자기가 터득한 경전의 내용을 그림[圖]과 학설[說]로 나누고, 문학의 형식을 시(詩)·부(賦)로 나누고, 가곡(歌曲)의 종류를 분류하여 책으로 기록하였다.

그는 사인(士人)을 만나면 안부를 물을 겨를도 없이 단박에 『대학』을 강론하였는데, 비록 용인(庸人)·무부(武夫)·동자(童子)·소리(小吏)라고 하더라도 가르치지 않을 수 없다고 생각하여 반드시 『대학』 한두 장(章)을 강습하였다. 사람들 가운데 비웃지 않는 이가 없었으나 그는 막무가내하고, 이것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주장하였다. 그가 지은 시조 중에 「도부(道賦)」, 「탄시(嘆詩)」, 「차기음(差綦吟)」, 「두곡우음(杜谷偶吟)」, 「유감(有感)」, 「임인제야시(壬寅除夜詩)」 등이 남아 있다.

관력, 행적

참고문헌

  • 『선조실록(宣祖實錄)』
  • 『정조실록(正祖實錄)』
  • 『일성록(日省錄)』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두곡집(杜谷集)』
  • 『인재집(訒齋集)』
  •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
  • 『간이집(簡易集)』
  • 『송암집(松巖集)』
  • 『옥산시고(玉山詩稿)』