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상교(南尙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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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784년(정조 8)~1866년(고종 3) = 83세]. 조선 후기 순조(純祖)~고종(高宗) 때의 문신이자 천주교도로, <병인박해(丙寅迫害)> 순교자. 세례명은 아우구스티노. 충주목사(忠州牧使), 돈녕부(敦寧府)동지사(同知事) 등을 지냈다. 자는 문숙(文叔)이고, 호는 우촌(雨村)이다. 본관은 의령(宜寧)이며, 거주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남이우(南履佑)이고, 어머니는 이기풍(李基豊)의 딸이다. 할아버지는 남규로(南奎老)이며, 증조할아버지는 현감(縣監)을 지낸 남태헌(南泰憲)이다.

순조~고종 시대 활동

남상교(南尙敎)는 정약용(丁若鏞)의 학통을 이어받은 인물로, 일찍이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여 1832년(순조 32) 공참(恭參)으로 관직생활을 시작하였다.[『음안(蔭案)』] 1848년(헌종 14)에는 충주목사를 거쳐 1865년(고종 2)에는 돈녕부 동지사를 제수 받았다.

그러는 가운데 그는 1827년(순조 27) 북경(北京)에서 영세를 받아 천주교에 입교하였다. 그리고 동생 남탄교(南坦敎)의 아들 남종삼(南鍾三)을 입양하여 입교시키고, 다른 천주교 교인들의 정신적 지주가 되었다. 그런 가운데 양자였던 남종삼이 영국·프랑스와 동맹을 맺어 러시아의 남침을 저지해야 한다는 방아책(防俄策)을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에게 건의하였다. 이와 함께 흥선대원군과 조선에서 선교활동을 하던 프랑스 신부들의 만남을 주선하였으나 이루어지지 못하였고 결국엔 이것이 흥선대원군이 천주교를 탄압하는 계기 중 하나로 작용하여 1866년(고종 3) 1월에는 양아들 남종삼과 함께 체포되었다.

남상교가 체포된 후, 사헌부(司憲府)대사헌(大司憲)임긍수(林肯洙)는 “그는 본래 약간이나마 재능과 식견이 있는 사람인데 도리어 사악한 책에 미혹되어 교주(敎主)를 신명(神明)처럼 받들고 고기 모이는 연못과 짐승 모이는 수풀처럼 흉악한 무리를 모아 오래도록 화란을 빚어낸 지가 이미 수십 년에 이르렀습니다. 아비가 그 자식에게 가르쳐주고 자식이 그 아비가 하던 것을 본받아 문득 가훈이 되었던 것입니다. 다른 나라 사람이 몰래 가까운 이웃에 숨어 있고 외국들과 조약을 맺었다고 말한 것은 비록 남종삼의 공초에서 나왔으나 그를 사주하여 거짓말을 꾸며대게 한 자는 그의 아버지였습니다. 그런데도 마치 아무런 잘못도 없는 사람처럼 보면서 편안히 누워있게 내버려두는 것은 비유하여 말한다면 김을 매면서 그 뿌리를 뽑아버리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라고 하며 남상교에 대한 엄한 처벌을 요구하였다.(『고종실록』 3년 1월 24일) 그러나 이때 남상교의 나이가 80이 넘었기 때문에 그는 처형을 면하고 대신 공주진영(公州鎭營)으로 옮겨졌으며, 그해 83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고종실록』 3년 1월 24일),[『승정원일기』 고종 3년 1월 24일]

참고문헌

  • 『고종실록(高宗實錄)』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음안(蔭案)』
  • 『진신보(搢紳譜)』
  • 『병인박해순교자증언록』
  • 샤를르 달레, 『한국천주교회사』하, 한국교회사연구소, 1980
  • 한국교회사연구소 편, 『한국가톨릭대사전』2, 2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