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복(時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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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 왕세자, 관리들이 입시할 때나 공무를 볼 때 입는 관복.

개설

왕, 왕세자, 관리들이 입시할 때 또는 공무를 볼 때 입는 옷으로 사모(紗帽)·단령(團領)·대(帶)·화(靴)로 구성된다. 형태는 상복과 같지만 흉배를 달지 않았다.

1) 왕의 시복

왕의 시복은 조선전기의 태종·세종대에 집중적으로 나타나고, 이후 문종·광해군·경종대에는 각각 1건씩의 기록만이 보이고 있어 조선전기에 주로 입었음을 알 수 있다. 조선전기에 왕의 복식이 정립되지 않은 상태에서 영칙서의(迎勅書儀)를 거행할 때 세종대까지는 주로 시복을 입었고, 성종대 이후 익선관(翼善冠)·곤룡포(袞龍袍)의 상복(常服)으로 정착하게 되였다.

중국 사신이 올 때는 대부분 조서(詔書)나 칙서 혹은 고명 등을 함께 가지고 오는 경우가 많아 면복(冕服)을 착용하거나 상복을 입었으며, 왕이 사신만 단독으로 맞이하는 경우는 많지 않아 의식에서 시복을 입었다(『태종실록』 6년 4월 19일).

1407년(태종 7) 이후로는 정조(正朝)·동지(冬至)·탄일(誕日)의 진하(進賀) 시 시복을 공복(公服)으로 바꾸게 하였으며(『태종실록』 7년 3월 9일), 왕이 종묘에 참배하거나, 조하를 받을 때, 칙서를 받을 때, 사은표에 절할 때도 시복 차림을 하였다. 문종대에는 망궐례 시에 아직 왕의 관복이 정립되지 않은 상태에서 임시로 왕이 시복을 입기도 하였다.

조선전기에는 시복이 공복을 대신하는 역할을 하였으며, 지위는 공복·면복보다는 격이 낮았지만 면복을 대신하여 입고 의례를 행한 경우도 있어 단순한 일상 근무복 이상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조선후기에는 사신 접견 시의 복식도 상복으로 대치되었다. 왕과 사간원(司諫院)의 시복 논의에 관한 기록을 보면 시복의 개념이 달라졌고(『광해군일기』 5년 4월 9일), 조선후기에 오면 익선관·곤룡포를 왕의 시복으로 하여 상복과 시복을 동일하게 입었다.

2) 왕세자의 시복

왕세자는 관례·복제가 끝난 후, 왕이 능에 행행 후 환궁할 때, 세자대행종묘제 후 음복할 때, 세자수조참의(世子受朝參儀)·대전헌수의(大殿獻壽儀)·행학의(幸學儀) 때 시복을 입었다.

탄일을 하례할 때, 추석제를 대행할 때, 왕세자가 조참을 받는 의례 시 종실과 문무군신 모두 시복 차림으로 입직하고, 왕세자도 시복 차림을 하였다. 또한 왕세자가 종묘제를 대행한 뒤 음복할 때에 제복을 벗고 시복 차림으로 나갔다. 북경에서 온 사은사의 칙서를 맞이할 때에도 시복을 입었다.

왕세자의 시복은 관례 시 착용이 가장 빈번하게 논의되었다. 관례 시 초출복(初出服)의 성격이 강하여 시복을 편복(便服)의 개념으로 볼 수 있지만, 조선후기에는 왕과 마찬가지로 시복을 익선관·곤룡포의 상복과 동일하게 받아들였다.

3) 문무관의 시복

조선전기에는 시복과 상복(常服)의 개념이 혼용되다가 15세기 후반에 용도로 관복을 구분하여 흑단령을 조회(朝會)·조계(朝啓)·조참(朝參) 때 입었다. 태조 이후 세종대까지 15세기 전반에는 단령의 상복과 시복은 같은 개념으로 사용되었다. 그 용도도 제복과 조복·공복을 사용하는 의례 외의 나머지 대소 의례에 입는 의례복은 물론, 일상 공무를 수행하기 위한 집무복을 겸해 입었다. 색상은 정해진 색이 없이 옥색·회색·토홍색·심남색·흑색·홍색 등 잡색 단령을 사용하였다.

15세기 후반에는 의례용 단령은 흑색(아청색), 집무용은 흑색 외의 잡색을 사용하였으며 시복과 상복이 여전히 같은 개념으로 사용되었다.

16세기가 되면서 의례용 단령인 아청색의 흑단령을 시복으로, 집무용 단령인 홍단령을 상복으로 구분하여 사용하였다. 의례용인 시복 흑단령은 아청색의 고급 직물을 사용하였다.

17세기 이후 『오례의(五禮儀)』에 근거하여 흑단령을 상복으로 결론내리고, 시복은 홍단령으로 규정하였다(『광해군일기(중초본)』 2년 9월 8일). 집무용 단령인 시복 홍단령은 잡색에서 토홍색으로 정착되면서 검소함을 중시하여 흉배는 달지 않았고, 소재도 소박한 것을 사용하였다. 이후 관복 제도가 간소화되는 고종대까지 용도에 따라 일관성 있는 색상이 유지되다가 1884년(고종 21) 갑신의복 개혁 때 시복과 상복색이 흑단령 하나로 간소화되었다.

참고문헌

  • 경기도박물관 편, 『초상, 영원을 그리다』, 경기도박물관, 2008.
  • 권준희·이순원, 「조선시대 時服에 관한 연구(1)」, 『복식』48호 , 1999.
  • 박현정, 「조선후기 시복제도 연구」, 『한국의류학회지』36호 , 2012.
  • 이은주, 「조선시대 백관의 時服과 常服 제도변천」, 『복식』55호 , 2005.
  • 이은주·조효숙·하명은, 『17세기의 무관옷 이야기』, 민속원, 2006.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