쌍동계(雙童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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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 정수리 부분에 두 개의 상투를 올린 머리 모양.

내용

쌍동계(雙童髻)는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관례(冠禮) 전에 했던 머리 형태로 고구려 고분 벽화에 쌍계를 한 여성들의 모습이 보인다. 1426년(세종 8) 2월 예조(禮曹)와 의례상정소(儀禮詳定所)에서 관복의 제도를 조사하면서 중국에서는 황태자가 원일(元日)과 동지에 황제와 황후에게 조하(朝賀)를 드릴 때는 원유관과 강사포를 착용하는데 아직 관을 쓰지 아니한 자는 쌍동계에 공정흑개책(空頂黑介幘), 쌍옥도(雙玉導)에 보식을 얹는다고 하였다(『세종실록』 8년 2월 26일).

1520년(중종 15) 3월 예조 판서(判書) 신상(申鏛)이 세자의 책봉과 관련하여 아뢰기를 “쌍동계의 형태는 고증할 수 없으나, 쌍동계는 동자(童子)의 의구(儀具)로서 편발(編髮)과 같을 것”이라 하였다(『중종실록』 15년 3월 8일). 그러나 편발은 땋은 머리로 쌍동계와는 전혀 다른 결발 양식이다.

한편 1521년(중종 16) 1월에 주청사(奏請使)질정관(質正官)최세진(崔世珍)이 소요건(逍遙巾)과 쌍동계에 대해 조사한 바에 의하면 “소요건은 일명 공정책(空頂幘)이고 쌍동계는 어린아이들이 정수리에 머리카락을 한 가닥 혹은 두 가닥으로 묶고 소요건을 덮어 쓰는데 황태자의 경우 쌍옥도를 소요건의 양쪽에 질러 소요건이 움직이지 않게 하며, 보통의 아이들은 뿔이나 뼈로 된 비녀를 쓴다.”라고 하였다(『중종실록』 16년 1월 26일). 조선시대 왕세자의 책례(冊禮)가 관례 전에 치러지는 경우 쌍동계 차림으로 관을 쓰고 면복을 착용하였다.

용례

未冠則雙童䯻 空頂黑介幘 雙玉導加寶飾(『세종실록』 8년 2월 2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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