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천지위(不遷之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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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한 공덕(功德)을 인정받아, 친진(親盡)이 되어도 별묘(別廟)로 옮기지 않는 종묘의 신위(神位).

개설

왕이 사망하면 그 육신은 4~5개월 뒤 능에 안치되고, 삼년상이 끝나면 그 혼은 신주와 함께 종묘로 옮겨졌다. 그런데 사망한 선왕의 신주가 모두 종묘에 영원히 모셔지는 것은 아니었다. 『예기(禮記)』에 수록된 ‘천자는 7묘(廟), 제후는 5묘’의 원칙에 따라 종묘에 모실 수 있는 묘의 대수(代數)가 제한되었는데, 제후국을 표방한 조선은 5묘로 한정되었다. 여기서 묘(廟)는 왕대(王代)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형제는 같은 세대로 간주하는 ‘동세이실제(同世異室制)’에 따라 세대(世代)를 의미한다. 따라서 당시의 왕을 기준으로 5묘가 넘는 신주가 새로 종묘에 들어올 경우, 맨 윗세대의 신주는 제사를 지내는 대수가 다한 친진이 되기 때문에 종묘에서 별묘인 영녕전(永寧殿)으로 옮겨졌다. 다만 건국에 특별한 공로가 있는 태조의 경우, 비록 친진이 되어도 왕조가 멸망할 때까지 영원히 ‘옮기지 않는 신주, 즉 불천지위(不遷之位)였다. 그에 따라 종묘의 5묘제는 불천위인 태조 및 4대(代)의 신위를 모시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건국자인 태조를 제외하고도, 왕조의 멸망을 막거나 흥성(興盛)을 가져오는 등 특별한 공(功)과 덕(德)이 있는 왕의 경우 친진이 되어도 계속 종묘에서 제사를 지낼 수 있다는 관념이 생겨났다. 이러한 신위를 ‘세실(世室)’이라고 한다. 세실은 친진이 되어도 종묘에서 옮기지 않는 불천위로, 5묘의 대수에 포함되지 않는 예외적인 경우였다. 흔히 불천위는 태조를 제외한, 공덕을 인정받아 예외가 된 신주들을 가리킨다.

내용 및 특징

송나라 때의 주희(朱熹)에 따르면, 세실 제도는 이미 주(周)나라 때부터 있었다고 한다. 그는, 주나라에서는 은(殷)나라를 멸망시키고 천하를 평정한 무왕(武王)과 문왕(文王)을 각각 무세실(武世室)과 문세실(文世室)로 삼았고, 그 결과 종묘는 천자의 7묘 외에 세실의 2묘가 합쳐져 실제로는 9묘가 되었다고 파악하였다. 이러한 주나라 때의 방식은 위진 남북조시대를 거치면서, 공(功)과 덕(德)이 있는 왕의 경우 불천위인 세실로 삼는다는 관념으로 발전하였다. 실제로 당나라의 종묘가 9세 11실, 송나라가 9세 12실, 명나라의 종묘가 9세 9실로 운영된 것은 천자의 7묘에 2묘의 세실을 포함하는 방식이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신라 때 유교적인 종묘 제도가 도입되면서 불천위가 처음 생겨났고, 고려시대를 거쳐 조선시대에 들어오면서 광범위하게 확대되었다. 중국과 마찬가지로 조선에서도 원칙상 공(功)이나 덕(德)이 있는 왕을 불천위로 지정하였다. 그러나 공덕이라는 기준은 상당히 주관적이었다. 불천위가 되지 못하고 별묘인 영녕전으로 옮겨진 신주들의 성향을 분석하면 불천위의 선정 이유를 명확히 알 수 있다.

오늘날 영녕전에는 목조·익조·도조·환조·정종·문종·단종·덕종·예종·인종·명종·원종·경종·진종·장조·의민황태자 등 16위(位)가 모셔져 있다. 이 가운데 대한제국이 망한 뒤에 모셔진 의민황태자를 제외한 15위는, 목조·익조·도존·환조 등과 같이 태조가 조선 건국 후 추증한 4대조와, 덕종·원종 등과 같이 태조 이후에 추증된 경우, 정종·단종·예종 등과 같이 즉위한 경험이 있는 경우 등 세 부류로 나눌 수 있다. 가장 수가 많은 추증된 신위의 경우 단 한 위(位)도 세실이 되지 못하였고, 즉위한 경험이 있는 경우 자신의 직계 후손이 왕이 되지 못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변천

우리나라의 역사서에 불천위의 개념이 처음 등장한 것은 통일신라시대였다. 『삼국사기(三國史記)』「제사지(祭祀志)」에 따르면, 36대 혜공왕(惠恭王) 때에 이르러 처음으로 5묘를 정하였는데, 이때 미추왕(味鄒王)·태종대왕(太宗大王)·문무대왕(文武大王)·경덕왕(景德王)·성덕왕(聖德王)의 신주를 모셨다. 그리고 그중 김씨 왕가의 시조인 미추왕과 삼국 통일에 공이 큰 태종대왕 및 문무대왕은 세대가 지나도 옮기지 않는 불천위로 설정하였다고 한다.

고려시대의 종묘 제도는 988년(고려 성종 7) 12월에 처음 5묘제를 정하면서 시작되었는데, 당시의 태묘 곧 정전(正殿)은 9실로 구성되었다. 그런데 숙종대 이후 형제가 왕위를 잇는 경우가 줄어들고 태자를 통한 왕위 계승이 일반화되자 종묘의 9실을 채우기 위하여 선왕 중 일부를 불천지주(不遷之主)로 정하였다. 예컨대 의종대에는 태조·혜종·현종을 불천위로 삼고, 문종, 순종·선종·숙종, 예종, 인종의 신위를 각각 모셔 5묘 9실제를 유지하였다. 고려후기에도 이러한 상황은 이어졌다. 예컨대 충렬왕대에는 태조 이하의 7대(代) 외에 혜종과 현종을 세실(世室)로 삼았는데, 이를 통해 불천위 제도가 여전히 유지되었음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에 들어와 불천위는 연산군대에 성종의 부묘(祔廟)를 시행할 때 처음 생겨났다. 당시 종묘에는 태조, 정종·태종, 세종, 문종·세조, 덕종·예종의 신위가 안치되어 있었다. 여기에 6대인 성종이 들어가게 되므로 2대인 정종과 태종의 신위가 친진되어야 하는데, 정종의 신주는 영녕전으로 옮긴 반면 태종은 공덕(功德)이 있다는 이유로 불천위로 간주하여 그대로 종묘에 모셨다. 인종대에 이르러서는 세종이 5묘가 넘는 친진의 대상이 되었지만, 태종과 같은 이유로 불천위가 되었다. 또 선조대에는 문종과 세조가 친진의 대상이었지만, 재조(再祚)의 공덕을 내세워 세조를 불천위로 삼았다. 이후 인종, 명종 등 자신의 직계 자손이 즉위하지 못하였던 왕과 후대에 추증된 왕을 제외한 모든 신위들이 불천위가 되었다. 이렇게 불천위가 늘어나자 이들을 모실 공간이 부족해졌는데, 명종·현종·헌종 등의 시대에 여러 차례 종묘를 증축하여 이 문제를 해결하였다.

현재 종묘 정전에는 태조·태종·세종·세조·성종·중종·선조·인조·효종·현종·숙종·영조·정조·순조·문조·헌종·철종·고종·순종 등 19위의 신위가 모셔져 있다. 대한제국의 황제국 체제를 기준으로 할 경우 태조·순조·문조·헌종·철종·고종·순종은 종묘의 본래 묘수(廟數)인 7묘에 해당하고, 태종 이하 정조까지의 신위는 불천위가 된다. 종묘의 기본 묘수가 7묘인데 반하여 예외인 불천위가 12실에 이르는 것은, 역대 중국의 종묘 신실(神室)과 비교할 때 상당히 특이한 경우이다. 이것은 외형상으로는 묘제의 원칙을 지키면서, 실제로는 신실을 늘려 왕권의 존엄성을 강조했던 조선왕조 통치자의 의지가 표현된 것이다.

참고문헌

  • 『고려사(高麗史)』
  • 『삼국사기(三國史記)』
  •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
  • 『국조속오례의(國朝續五禮儀)』
  • 『춘관통고(春官通考)』
  • 『십삼경주소(十三經注疏)』
  • 『문헌통고(文獻通考)』
  • 『명집례(明集禮)』
  • 『주자전서(朱子全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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